이상국기자
1957년 조긍하감독 영화 '황진이'의 도금봉.
황진이가 마음과 앞섶을 여는 남자들 중에는 가수 두 사람이 있다. 그중 한 사람은 이언방(李彦邦)이다. (이언방 이야기를 실은 사람은 허균이다.) 조선 명종 때의 명창이었던 그는 여자 목소리를 잘 냈다. 가락이 맑고 높아서 듣는 사람들이 일제히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고 한다. 평양에서 이언방은 특별한 공연을 했다. 교방 기생 200명을 열을 짓도록 하여 앉혀놓고 한 사람마다 다가가 노래를 시켰다. 기생이 선창을 하면 이언방이 화답을 하는 형식이었다. 200명 중에는 행수(行首)기생도 있었고 열 살도 안되는 동기도 있었다. 이 남자는 여자들의 모든 목소리에 맞춰 막힘없이 노래를 불렀다. 이 놀라운 이벤트에 관한 소문은 황진이의 귀에도 들어갔다. 당대 노래의 귀재인 그와 만나 놀고 싶었다. 열 일 제쳐놓고 황진이는 이언방을 만나러 간다. 그런데 희대의 ‘남자 소프라노’인 그는 무대 바깥에서는 여자처럼 수줍음이 많았다. 절세 미인 황진이가 불쑥 얼굴을 내밀자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가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혹시 댁이 이백 명의 여자 목소리를 가진 이언방이란 분이...신가요?”언방은 불쑥 시치미를 뗀다. “아...닌데요.”“그럼, 뉘신지요?”“저는, 이언방의 아우 됩니다. 형님은 밖에 나가셨소.”“그렇다면 그분이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소이다.”“누구시며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시오?”“나는 송도 기생 황진이라고 하옵고, 그의 음악을 사모하여 함께 터놓고 노래하고 싶어서 이렇게 달려왔소이다.”“황진이라면, 뭇사람들이 신이 내린 목소리라 말했던 그 기생이 아니오?”“이언방 선생의 목소리에 비한다면 쇳소리에 불과합니다.”“제가...형님의 노래를 조금 흉내낼 수는 있습니다만...”“그러하오?” 이언방은 최대한 목청을 긁어가며 남자 목소리를 낸다. 한 곡조가 끝났을 때 황진이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한다.“나를 속이지 마시오. 내가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노래요. 당신이 이언방이오. 제나라의 명창 면구(綿駒)와 당나라의 가수 진청(秦靑)인들 당신보다 잘 부를 순 없을 겁니다.”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