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전 세상 떠난 가수와 '걱정 말아요 그대' 전인권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 2005년 2월22일. 1980년생 배우 이은주. 24년의 삶을 채운지 딱 두 달 뒤 그녀는 돈 때문에 힘겨웠다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떴다. 유서 속엔 "꼭 오늘이어야만 한다고 했던 사람. 고마웠어"라고 언니라고 호명된 누군가에게 말을 남기고 있다. 그녀의 죽음이 꼭 오늘이어야만 한다고 누군가 그녀에게 말해줬다는 얘기다. 2월22일은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2001년 개봉)에서 인태희(이은주 역)가 죽은 날이라는 '소문'이 있었으나, 시나리오에는 서인우(이병헌 역)가 군대가기 전날이라는 사실만 나올 뿐 날짜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유서에 나온 '오늘이어야만'이란 말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영화의 스토리와 연결시켜 언론들이 '작문'을 한 셈이다. 서인우는 죽은 인태희를 그리워하며 이런 편지를 쓴다.“몇번을 죽고 다시 태어난대도, 결국 진정한 사랑은 단 한 번 뿐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는 심장을 지녔기 때문이라죠. 인생의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대도, 그 아래는, 끝이 아닐 거라고, 당신이 말했었습니다. 다시 만나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2005년 작고한 배우 이은주.
서인우의 저 고백은, 인태희에게만이 아니라 지금 고인이 된 배우 이은주에게 향한 메시지인 것만 같아 가슴을 친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유독 깊고 애절한 감회를 드러내던 이가 있었다. 최근 '걱정말아요, 그대'라는 옛 곡이 새롭게 붐을 타면서, 다시 큰 조명을 받게된 가수 전인권(1954년생)이다. '걱정말아요, 그대'는 전인권이 낸 자서전 에세이이기도 하고, 이은주 장례식에서 불렀던 노래이기도 하다. 그는 "은주와 나는 레옹과 마틸다같은 사이였다"고 말했으며, 자신이 내는 책에도 그런 말을 실었다. 4년 동안 남녀 사이로 사랑했다고 그는 주장한다. 영화 '레옹' 속의 두 남녀 킬러인 레옹과 마틸다의 애정지수는 여자 쪽에 기울어져 있다. 레옹은 마틸다의 구애에 프로킬러의 싸늘한 표정만 되돌려 줬을 뿐이다. 관객들은 둘 사이에 사랑의 기미를 찾아 나섰지만, 번번이 실패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레옹이 모텔방의 벽을 깨고 마틸다를 밖으로 내보낼 때 그녀와 눈을 맞추는 장면. 마지막에 했던 말. "I love you!" 사랑은 죽음 앞에 언뜻 비친 신기루같았지만, 관객들은 그 중얼거림을 가슴에 안고 돌아온다.
영화 '레옹' 속의 레옹과 마틸다.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 편에 빨간 석양이 물들어 가면놀던 아이들은 아무 걱정없이 집으로 하나- 둘씩 돌아가는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나 저 석양은 나를 깨우고 밤이 내앞에 다시 다가오는데이젠 잊어야만 하는 내 아픈 기억이 별이 되어 반짝이며 나를 흔드네 저기 철길 위를 달리는 기차의 커다란 울음으로도 달랠수 없어 나는 왜 여기 서 있나 오늘밤엔 수많은 별이 기억들이 내앞에 다시 춤을 추는데 어디서 왔는지 내 머리위로 작은새 한마리 날아가네 어느새 밝아온 새벽 하늘이 다른 하루를 재촉하는데 종소리는 맑게 퍼지고저 불빛은 누굴 위한걸까 새벽이 내앞에 다시 설레이는데 전인권의 '사랑한 후에'전인권의 주장에 대해 이은주의 유족은 "고인을 두번 죽이는 일"이라며 펄쩍 뛰었다. 유족 측에 따르면, 전인권이 사랑이라 말하는 관계는 일방적인 감정이었다. 스토커 수준의 집착이 오히려 그녀를 괴롭혔다는 의견이다. 살아있는 한 남자는 죽은 여자를 사랑했다 했고, 죽은 여자는 말이 없다. 이 말없는 여자를 대신해 떠들어주는 건 세상의 수많은 입방아들이다. 시장통처럼 시끄러워서 말의 가닥을 잡긴 어렵지만, 들국화 팬들의 말을 요약해보면 이렇다. (1)전인권이, 해서 득될 것도 없는 고백을 뒤늦게 하는 까닭은 그의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이다. (2)이 위대한 가수는 수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으며, 그가 마음을 먹는다면 다른 어리고 예쁜 사람과 사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직 이은주 만을 좋아한 것이다. (3)이은주 상가에서 흘리던 전인권의 눈물을 기억하는가. (4)'4년 동안'이라는 구체적인 언급은 그들 사이에 있었던 긴밀한 소통의 기간을 말하는 것이다. (5)마틸다가 레옹에게 끝없이 구애한 것처럼, 이은주도 전인권에게 깊이 마음을 열었을 것이다.
이은주(왼쪽)과 전인권(맨오른쪽)
이은주 유족이나 일부 팬들의 이야기는 좀 다르다. (1)죽은 뒤에까지 그걸 사랑이라 우기는 집착은 바로 '자기를 위로'하기 위한 몸짓일 뿐이다. (2)이은주의 '거부의 손사래'가 전인권을 더욱 자극시켰고 그것이 집착으로 이어졌다. (3)상가에서의 행동은 이은주가 어쩔 수 없지 않는가. 과연 그러나 그녀가 그의 위로를 받아들였을까. 그의 스토킹을 용서는 했을 것이다. (4)'4년 동안'은 검증할 수 없는 일방적인 진술이지만, 전인권이 그녀를 쫓아다닌 기간일 수도 있다. (5)전인권은 자신을 레옹이라 착각했지만, 그는 레옹이 아니라 영화 <더 팬>의 로버트 드 니로를 닮았을 뿐이다. 끝없이 환영에 사로잡혀 현실적인 대상을 힘들게 했다.그녀가 전인권에게 보낸 마지막 문자메시지는 눈길을 끈다. 죽기 이틀 전인 2월20일 전인권이 받은 문자메시지는 "오해가 있었어요, 죄송해요 그러려고 그런거 아니예여 죄송합니다"였다고 한다. 전인권은 "당시 지방에 가는 중이었는데 연락이 잘 되지 않았고 오해가 있어 다투고 있던 중 마지막으로 문자메시지를 받았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유족 측은 다르게 설명한다. 전인권이 계속 스토커처럼 전화를 걸어서 받지 않았는데 전인권이 "너, 나를 무시하냐"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한다. 이에 마음 여린 이은주가 저 메시지를 보냈다는 얘기다.전인권이 밝힌 '오해'와 '다툼'. 이은주의 '죄송해요'가 그 오해와 다툼에 대한 사과인지, 혹은 '나를 무시하냐'에 대한 응답인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이은주가 살아있다 하더라도, 저 사랑의 진정성과 상호 소통에 관한 논란은 잠재울 수 없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은 지독하게 주관적이고, 애매하기도 하고, 또 상호 오해와 착각들이 개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가 오해와 다툼이 없었던 '좋은 한 때'가 있었을 수도 있겠다. 서로 호감과 편안함으로 좋은 눈길을 보내던 때가 있었으리라. 그것을 사랑으로 확신한 한 쪽과, 그 감정은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던 다른 쪽 간의, 추격전으로 바뀌어갔는지도 모른다.나는 이 사랑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름답다는 데 한표를 던지지도 않는다. 다만 사랑이라고 믿는 일들이 빚어내는 인간의 오래가는 아픔들을 쓸쓸하게 주목할 뿐이다. 11년 뒤인 오늘. 전인권은 '걱정 말아요, 그대'라는 이름의 콘서트로 전국 투어를 준비하고 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로 뜬 이 노래의 힘을 빌어, 대중과 새롭게 소통하려는 노력이다. 그는 오늘 이은주의 날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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