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豊臣의 “명 정벌” 뜻 명에 전할지 논란…명 심유경은 倭 강화조건 조작
[아시아경제 백우진 기자] 임진왜란 2년 전인 1590년에 조선 사신 일행은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만나 답서를 받아왔다. 통신사 건에 대해 조선이 보낸 국서에 대한 답서였다. 황윤길이 상사, 김성일이 부사를 맡은 사신들이 받아온 답서에는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를 치고자 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이른바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나라를 치고자 하니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는 요구였다. 이 내용을 둘러싼 조선 조정의 갑론을박은 잘 알려졌다. 상사 황윤길은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부사 김성일은 이에 대해 “공연히 인심을 현혹시키고 있다”고 반박했다. 도요토미의 의도와 일본 정세에 대한 오해 못지 않게 관심을 끄는 것이 일본의 정명가도 뜻을 명나라에 알려야 하는지를 두고 벌어진 공방이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자신은 “당연히 이 내용을 명나라에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영의정 이산해가 반대했다. 이산해는 “그러다가 우리가 일본과 내통했다고 하면 어찌한단 말이오?”라며 “차라리 모른 체하는 편이 나을 듯하오”라고 말했다. 유성룡은 “이웃 나라와 왕래하는 것이 어찌 문제가 되겠습니까?”라며 “만일 이 사실을 숨긴다면 대의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우리를 모략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다른 방법으로 명나라에 이 사실을 알린다면 우리가 일본과 공모했다는 혐의를 벗어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조선은 결국 김응남 등을 보내 이 사실을 명나라에 알리기로 한다. 15일 방송된 KBS 사극 ‘징비록’에서는 이후 이야기를 전한다. 명나라 황제 만력제(萬曆帝)는 조선 사신에게 “통신사를 파견한 지 1년인데 이제야 고하는 것은 무슨 이유냐”며 “왜국과 연계해 명나라를 치려는 것이 아니냐”고 힐문한다.
명나라 황제 만력제. 사진= KBS 사극 '징비록' 캡처
당시에는 이처럼 ‘사실’ 그 자체보다 그 사실을 전했을 때 상대방의 반응을 고려하는 일을 더 중시했다. 이는 도요토미의 답서를 사실 일행이 여러 번 고칠 것을 요구한 데에서도 나타난다. ‘징비록’은 “그 내용이 하도 거만해서 우리가 바라던 것과는 큰 차이가 났다”며 김성일이 그 글을 받지 않았고 여러 차례 퇴짜를 놓았다고 전한다. 도요토미의 거만함은 그 자체가 사실인데 그것을 선조에게 보고하기 꺼렸다는 얘기다. 국서를 축소ㆍ왜곡 보고하는 행태는 조선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명나라 사신 심유경도 1593년 일본을 방문해 도요토미가 요구한 ‘강화 7개조’를 받지만 이를 명 조정에 상신하지 않는다. 대신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가짜 국서를 올린다. 당시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한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책 ‘일본사’에 따르면 도요토미는 심유경에게 ‘화평의 표시로 황녀 한 명을 자신의 아내로 삼도록 보낼 것’ ‘일본에 충성과 예속의 표시를 할 것’ ‘중국 황제가 가진 조선의 5개 지방을 자신에게 넘길 것’ 등 7가지를 요구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진= KBS 사극 '징비록' 캡처
심유경이 도요토미의 국서를 위조한 것은 ‘황녀를 하가(下嫁)시킨다’는 내용이 명 황제에게 보고조차 할 수 없는 사안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명기 명지대 교수는 한겨레신문 연재에서 설명한 바 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심유경의 국서 위조를 거론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원하는 것이 너무 지나쳐 봉공 이상을 요구하고 있었다”고만 전한다. 심유경의 국서 위조는 이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조선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부분은 추후에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백우진 기자 cobalt100@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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