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재 사회문화부장
오랜만에 많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어느 노정객의 말들이 화제를 모았다. 아흔 살을 앞둔 그는 그 고령이 믿기지 않는 총기를 보여줬다는데, 그건 아마도 자기 삶의 조각들이 곧 한국 현대사의 장면들인 인물의 안에 쌓여 있는 많은 이야기들이 그를 편히 놓아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60여년 해로한 부인을 보내는 자리에서 나온 그의 말, 그를 둘러싸고 펼쳐진 풍경들은 새삼 이 예외적이며 역설적인 인물이 한국 정치, 한국 사회에 남긴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게 된다. 한시를 읊는 멋과 운치, 멋들어진 말로 상황을 요약하는 명민함과 교양을 갖춘 그는 한국의 정치에서 보기 힘든 것, 한국의 많은 정치인들이 갖지 못한 것을 지녔다. 그 점에서 그는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영원한 조연이라고 불리지만 어느 주연보다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줌으로써 주역의 자리에 올랐다. 여기에 그의 역설이 있는데 그러나 그의 진짜 역설은 다른 데, 아니 바로 거기에서 나왔다. 저 1961년 5월 이후 한국 현대사의 주요 장면에 그는 거의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역사' 밖으로 벗어나 있었다. 그는 실은 역사를 산 것이 아니라 철저히 자기 삶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그가 살았던 것은 거의 늘 역사의 표면이었다. 그래서 그는 오래 살아남았다. 여기에 그의 성취가, 그의 승리가 있었다. 그러나 또한 거기에 그의 실패가 있었다. 그가 불운했다면, 대통령이 못 돼서가 아니라 끝내 자기 삶의 표면 아래 진짜 역사로, 자기 몸을 찢으며 그 속으로 내려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에겐 자신의 삶이 역사 속의 한 부분이 아니라 역사가 자신의 삶의 장식물이었다. 그에게 역사는 '이야기'로, '드라마'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자신은, 또 많은 이들은 그가 정치를 해 왔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게 그의 삶은 일종의 생존기와 적응기, 역사를 쓰고 싶었으나 역사의 뒷얘기꾼이 된 한 인물의 인간극장으로 비친다. 그가 회고록을 쓸지가 큰 관심인 모양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쓰지 않겠다고 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삶에 대한 솔직한 진술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희비극의 이해에 작은 기여를 했으면 한다. 마침 실제 있었던 일과 믿고 싶은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인지 부조화'에 빠진 듯한 어느 전직 대통령의 자서전이 실소를 자아냈던 터이니 더욱 회고록의 모범을 보여줬으면 한다. 이명재 논설위원 promes@<ⓒ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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