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옛 사람들의 말을 믿으려면, 우선 노자의 천지불인(天地不仁)을 타파해야 한다. 노자는 하늘과 땅이 착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나쁘지도 않다. 천지는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으니 선악이 있을 수 없으며 시간과 공간은 다만 인간의 유정(有情)과는 상관없다는 점에서 비정하다고도 볼 수 있다는 얘기이다. 신이 분별과 판단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즉 신이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인간의 선악을 굳이 가려내서 복을 주고 벌을 줄 리가 없어진다. 이것이 옛사람들의 하느님 딜레마이다. '하늘'이 인간의 문제에 개입하느냐 아니냐가 종교를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종교의 문제와 상관없이, 하늘이 생각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착한 자가 복을 받고 악한 자가 벌을 받을 확률은 있다. 착한 행위를 하고 착한 마음을 먹는 사람은, 그 행위와 마음이 타인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좋은 반향을 불러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악한 행위를 하고 악한 마음을 먹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타인은 그를 멀리하고 비난하고 공격할 것이다. 타인이 나서지 않는 경우라 하더라도, 공동체의 규약들이 인간의 선악이 만들어낸 행위에 대해 신상필벌을 하기도 한다. 이 개연성을 확대하여 '신'이나 천(天)이라는 상징적 존재를 상정하여 인간에게 권하는 행위의 설득력을 높여온 것일까. 그렇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을 상주고 인간을 벌하는 존재는 인간일 뿐이다. 인간 사이에 떠도는 평판이 상과 벌을 만든다. 선악이란 인간의 개념일 뿐이며, 인간의 관계와 사회적 편의에서 만들어진 상대적 가치일 뿐이다. 이것을 절대적이고 완전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생각들이, 인간을 괴롭히고 억압해온 도그마이다. 흠없이 완전한 선(善)이 존재하며 또한 인간들 사이에서 배제해야 하는 절대적인 악(惡)이 존재한다는, 구분과 분류가 자주 전쟁을 만들고 양보할 수 없는 치명적 갈등을 만들고 인종 청소와 종파 압살의 광기로도 나아가기도 한다. 선악에 대한 신념을 신의 자리로 올려놓으면서 가치의 갈등은 더 치열해져 왔다. 악한 자는 단순히 악한 행위를 한 자가 아니라, 신에게 대항하는 악마로 지목되고 그를 제거하는 것은 악의 전염을 방지하는 엄정한 선(善)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옳은가. 선과 악에 대한 자의식의 측면도 흥미롭다. 악한 행위를 한 대부분의 사람은 마음 속에 '가책'이라는 것을 느낀다. 이 가책은 악한 행위를 한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선(善)이 뒤늦게나마 작동하고 있는 징후라 할 만하다. 이 가책이 사라지고 악한 행위에서 무심(無心)과 비정(非情)을 유지하는 경우라면, 악의 한 도(度)를 넘어섰다고 할 수 있다. 가책이 악한 행위를 뒤로 당기지 않는 경우, 우리는 이런 무시무시한 악에 대한 공포를 깊이 지니고 있다. 선한 행위를 한 대부분의 사람은 마음 속에 '자부심'을 느낀다. 이 자부심은 선한 행위를 한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자애(自愛)와 이기(利己)의 너울이다. 보통사람들은 모두 착한 행위를 하면서 그 착한 행위를 하는 자기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나무랄데야 없지만, 착한 행위를 하는 동기가 착한 행위 자체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조금은 불순하다. 이 자의식이 사라지고, 착한 행위에 대한 완전한 무심을 유지하는 경우라면, 선의 한 도(度)를 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 또한 많지 않지만, 선의 본령은 이러하지 않을까 싶다. 진짜 악인과 진짜 선인은, 개념적으로 상정할 수는 있지만 아주 드물다고 할 수 있고, 대부분의 선행과 악행들은 이기심이 섞인 선행과 가책이 뒤따르는 악행이다. 그것들을 우린 '인간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선악을 무시무시한 거대담론으로 끌어올리려는 사람들은, 저 인간적인 선행과 악행을 교정하려는 의욕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대한 '빽'으로 선을 격려하고 장려하는 일이 '권선(勸善)'이며 하늘의 촘촘한 그물망을 절대 못 벗어난다고 겁주며 말리는 일이 '징악(懲惡)'이다. 취지야 좋지만 방법이 지나쳐서 다른 부작용을 부르기 쉬운, 가치 정립 시스템이다. 오랫 동안 우리가 그런 것을 겪으며 느껴왔으니, 지금쯤은, 선과 악의 강박에서 힘을 좀 빼게 해주는 건 어떨까. 너무 무겁지 않은 선과 너무 사납지 않은 악의 동거를 인정하며 그 정도를 부드럽게 조율하는 일에, 조금 더 마음을 기울이기만 해도, 착하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잘났다 못났다, 미쳤다 돌았다 따위의 격한 손가락질이 줄어들 것이다. 착한 사람은 복 받을 확률이 높다. 이웃이 그 복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도 기분이 좋아진다. 나쁜 사람은 그 반대이다. 아참, 그리고 확률이 높을 뿐이지 항상 그런 건 아니다. 이 간단한 명제에 왜 그토록 집요한 가치를 심으려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위에서 논의한 것은 착한 것과 나쁜 것을 누구나 쉽게 구별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런 것도 있기는 하다. 사람들이 모여사는데에 도움과 즐거움이 되는 행위들과 방해나 공포가 되는 행위들로 나누면 선과 악은 대략의 그림이 그려진다. 권하는 행동은 선이며 말리는 행동은 악이다.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선과 악은, 관점과 입장의 문제, 그리고 신념과 가치관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내 눈에는 선(善)인 것이 다른 이의 눈에는 악(惡)이 될 수 있으며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매국노의 아들이 효도를 하면 선행처럼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이라는 가치가 개입되어 작동하기 때문이다. 기자가 기사거리를 입수하는 능력은 신문사에서 권장되는 선(善)이지만, 검찰의 수사 기록을 몰래 훔친 경우라면, 다른 기준이 작동한다. 혼외 관계에 대해 엄격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선으로 비치지만, 혼외 관계를 이용하여 어떤 이익을 누리고자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착하다는 것과 악하다는 것이 자주 혼선을 빚고 논란과 갈등을 부르는 까닭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한 사람이 보는 나쁨이 다른 사람이 보는 나쁨과 다를 수 있으며, 그 다른 것이 논리의 모순이 아니라는 점. 착한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개념은, 우선 '착하다'는 내용에 어떤 것들이 포함되는지 세목이 모두 규정될 수 있어야 한다. 삶이 단순하던 시절에는 착하다는 것에 대한 관점과 입장도 단순했을지 모른다. '복'도 문제이다. 어떤 것이 복을 받는 것인가. 돈이나 다른 사례로 보상되는 것인가. 자신의 불운을 줄여주는 것인가. 혹은 흡족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인가. 아니면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인가. 그걸 과연 모두가 동일하게 '복'으로 느끼기는 할까. 문제가 슬슬 더 복잡해졌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 대개 그렇다. 어떤 착함인지는 알 수 없으니 저마다 해석이 다를 수도 있다. 아랍의 착함과 미국의 착함이 다르다. 아랍에선 복을 받아야할 착함이 미국에서 미사일 폭격으로 응징해야할 나쁨이 될 수 있다. 그 나쁜 무리들의 응징에 죽음을 당하는 일이 복받는 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밀양 송전탑 공사를 하려는 사람들은 악이고 그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선인가. 그 마을사람들이 당하는 것을 막겠다고 그곳에 들어와 함께 투쟁을 벌이는 운동가들은 선인가. 혹은 그 반대인가. 약자는 선이고 강자는 악인가. 국가나 권력은 악이고 주민은 선인가. 송전탑 공사가 악인가. 왜 우리 마을에 꼭 들어와서 고압전류를 흐르게 하느냐는 논리가 악인가. 약한 자의 편을 드는 싸움은 선인가. 이때의 선과 악들은 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주는가. 그 목표가 무엇에 있는가. 선악이 입장과 관점의 문제라는 점을 간과하면, 세상의 맥락을 제대로 읽기 어렵다. 절대적인 선과 악이 있다는 생각은, 때로 자신의 생각을 '보편'에 올려놓고 타인에게 강요하려는, 일반화의 치명적 오류일 수도 있다.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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