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원기자
박원순 새정치민주연합 서울시장 후보[일러스트=이영우 기자 20wo@]
처음에는 검사의 길을 택했지만 '맞지 않는 옷'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6개월이 걸리지 않았다. 부장검사의 권유로 1년을 채우고 나온 그는 1983년 변호사로 개업했고 '인생의 멘토'와 함께 인권변호사의 삶을 살게 됐다. '전태일 평전'의 저자이기도 한 고(故) 조영래 변호사와의 만남은 박원순이 시민운동가로 변신을 꾀하는 첫 단추였다. 둘은 늘 붙어 다녔고 금세 법조계에 이름을 알렸다. 1986년 '정법회' 결성을 시작으로 1988년에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을 주도했다. 권인숙 성고문 사건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맡은 것도 이 때였다.박원순은 인권변호사로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게 됐다. 그러던 즈음 '조변'은 '박변'에게 "다른 것도 한 번 해보는 게 어떻겠냐. 공부도 더 해봐라"는 조언을 남기고 폐암으로 그의 곁을 떠났다. 조 변호사의 말대로 1990년대 초 2년 동안 영국과 미국을 떠돌던 박원순은 시민운동에 눈을 떴다. 변호사가 법정이 아닌 일상생활 속에서 약자를 대변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시민단체에 참여하는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는 곧바로 참여연대를 조직했다. 참여연대에 집중하기 위해 변호사직까지 내던진 박원순은 참여연대에서 일했던 시간을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했던 시기라고 말한다. 후배에게 길을 내주겠다며 어렵사리 참여연대를 떠난 그는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릴 정도였다고 한다.시민운동에 발을 들인 박원순은 그 후로도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기부나 나눔 문화가 어색하기만 한 시절, 그는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를 만들어 '1% 나눔 운동' 설파에 나섰다. "나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무슨 기부 타령이냐"며 "정치하고 싶은가 보다"는 비아냥도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기부문화의 시초를 박원순이 닦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시민운동가 박원순의 마지막 변신은 희망제작소 소셜 디자이너(사회를 디자인하는 사람)로 일단 끝났다. 서울시장에 출마하기 직전까지 마지막으로 맡은 일이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였다. 그는 희망제작소를 '21세기 실학 운동'이라고 불렀다. 안 가본 데 없을 정도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현장에 강한 시장'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 것도 다 이 시절의 경험 덕분이다. 박원순은 "문제를 파악하려면 필히 현장에 가봐야 하고, 문제의 해결책 역시 현장에 있다"고 믿는 실증주의자에 가깝다.박원순은 어떤 조직을 만들더라도 자신이 대표직을 맡지 않았다. 자신보다 더 훌륭하고 그 조직에 맞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자신의 밑으로 불러올 수는 없으니 늘 비워둔다는 것이다. 조직이 일정한 궤도에 오르면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나왔다.정치평론가들이 본 박원순
박원순은 바쁜 와중에 30권에 가까운 책을 펴낸, 지독한 '활자 중독자'이자 '책벌레'이기도 하다.일각에서는 박 후보가 추진력이 부족하다며 문제 삼는다. 하지만 그는 "뭐든지 한 번 시작하면 완전히 끝날 때까지 한다"면서 "소극적인 성격이지만 집중의 힘은 대단하다"고 얘기한다.김수진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박 후보의 강점에 대해 '경쟁력 있는 철학'을 꼽았다. 김 교수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박 후보의 철학은 선진 민주국가가 공유하고 있는 앞서가는 철학"이라며 "현대 민주정치의 큰 조류와 새 정치의 가치와도 일치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이종훈 시사평론가는 "이명박ㆍ오세훈 전 시장을 거치는 동안 누적된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다 보니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 같다"면서 "만약 재선에 성공한다면 큰 그림을 그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변신의 귀재'인 박 후보의 종착지는 서울시장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의 변신은 현재진행형이다.김혜원 기자 kimhye@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