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철의 인사이드스포츠]프로야구와 전두환

매진 이룬 야구장[아시아경제 DB]

프로야구가 29일 만원관중의 환호 속에 막을 올렸다. 궂은 날씨로 롯데와 한화의 부산 경기가 취소됐지만 30일에는 화창한 봄 날씨 속에 전국 4개 구장에서 수많은 팬들이 프로야구를 즐겼다. 다소 이르지만 2년 만에 700만 관중 기록을 다시 쓸 것 같은 분위기다. 1981년 12월 11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에메랄드룸에서 열린 ‘한국프로야구위원회’ 창립총회에서 서종철 총재의 취임사 일부가 현실화됐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국민에게 밝고 건강한 여가 선용을 약속드린다”라는 대목이다.글쓴이는 2000년대에 접어든 이후 프로야구가 새로운 시즌을 맞을 때마다 받는 질문이 있다. 올 시즌을 앞두고도 어느 케이블 채널 프로그램 취재진이 프로야구 출범에 얽힌 이러저런 질문을 하는 가운데 물었다. 프로야구가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에 힘입어 탄생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물음에 글쓴이는 시기적으로 보면 그런 해석이 가능하지만 프로야구의 태동은 어느 정도 예비가 돼 있었다고 답한다. 그리고는 30여 년 전의 일을 떠올리곤 한다. “너, 전두환의 주구(走狗)지.” 대학을 졸업한 지 3년여 만에 만난 동기 녀석이 특유 직선적인 말투로 자리에 앉자마자 쏘아붙였다. 1982년 10월 말 도쿄의 어느 조그만 호텔 로비에서 벌어진 일이다. 글쓴이는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기자에서 해직돼 식품회사에서 일하다 1982년 2월 1일 이제 막 꾸려진 한국야구위원회에 홍보 담당으로 입사했다. 도쿄를 방문한 건 그해 가을 세이부 라이온즈와 주니치 드래건즈의 일본시리즈를 비롯해 일본 프로야구를 견학하기 위해서였다. 대학 동기는 그때 도쿄에서 3년째 유학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국내에 있는 친구들보다 더 세세히 알고 있었으니 그런 독한 말을 할만도 했다. 스포츠에 별로 관심이 없는 녀석이어서 그때는 달리 더 얘기하진 않았지만 요즘 프로야구 출범과 관련한 질문을 받으면 아래와 같은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야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팬이라면 1970년대 중반 이미 프로야구와 관련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1974년 재미동포 홍윤희 씨와 장태영, 허종만, 김계현, 이호헌, 허정규, 정두영 등 진취적인 야구인들은 가칭 ‘한국직업야구추진위원회’를 만들고 매우 구체적인 프로야구 출범 계획을 세웠다. 정부의 무관심과 대한야구협회의 시기상조 주장에 밀려 불발됐지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고교 야구를 비롯한 아마추어 야구를 담아내기 위한 그릇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많은 야구인들이 동감하고 있었다. 글쓴이는 1979년 ‘주간스포츠’에 입사해 선배인 김창웅 야구 담당 기자와 광화문에 있는 성궁다방에서 ‘서울 깍쟁이들’, ‘평양 박치기들’ 같은 프로 야구단 이름을 만들며 잡담을 나누던 일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뒤에 김창웅 선배는 한국야구위원회 초대 홍보실장이 됐고 앞에 나온 서종철 총재의 취임사를 작성했다. 취임사에는 야구팬들이 잘 알고 있는 “새싹들(‘어린이들에게’로 인용되곤 한다)에게 꿈을”이란 대목도 있다. 김창웅 선배는 대학 시절 소설 ‘무진기행’의 김승옥 작가와 동문수학한 문학청년이었다. 아무튼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의 틀은 1970년대 중반 추진됐던 프로화 작업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치적 목적 여부와 관계없이 프로야구는 출범 첫해 경기당 평균 관중이 6천 명에 이르는 성공적인 출발을 했고, 2015년 10구단 체제에 이어 2016년 대구 새 야구장이 개장하면 천만 관중 시대를 겨냥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다. 자타가 인정하는 국민적 여가 수단이 된 것이다. 글쓴이는 초창기 프로야구 홍보를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뛰었다. 지금 보면 웃음이 나오는 ‘장타력도’(누타 수/안타 수)라는 걸 만들어서 신문사에 보내기도 하고, 보도 자료를 통해 75% 이상이 돼야 팀 공격에 도움이 된다는 풀이를 붙여 도루 성공률(도루 수/도루+도루자 수)을 배포하기도 했다. 해태의 김봉연이 2가 넘는 ‘장타력도’를, 같은 팀의 김일권이 도루 성공률 80% 이상을 기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신문사 기자는 글쓴이가 전화로 긴 시간 설명한 내용을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그대로 기사화화기도 했다. 어쭙잖지만 오늘날 프로야구가 자리를 잡는 데 한몫을 했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생각해 본다. “나는 전두환의 주구였나.”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아시아경제 & 스투닷컴(stoo.com)이 만드는 온오프라인 연예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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