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어.... 먼저 일어설게요. 남선생님은 좀 계시다가 오세요.” 하림이 자기 앞에 놓인 찻잔을 정리해놓고 일어나며 말했다. “아뇨. 저도 가야지요.” 남경희가 발딱 따라 일어났다. 수관 선생도 별로 말리는 기색이 아니었다.“차 잘 마셨어요.” 방문 밖으로 나가 따라 나온 수관 선생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까닥하며 하림이 말했다. 남경희는 하림 뒤에 약간 뚱한 표정으로 말없이 서있었다. “또 와요.” 수관 선생이 빈말삼아 말했다. 무언지 모르게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마당의 닭들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다니며 먹이를 쪼고 있었다. 집을 둘러싼 숲에서 벌써 여름 벌레 우는 소리가 자욱하게 들렸다. 수관 선생의 황토집을 나온 두 사람은 아까 왔던 길을 따라 계곡을 끼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림이 앞서고, 남경희가 뒤를 따랐다. 하림은 하림대로, 남경희는 남경희 대로 각자 자기 생각에 잠긴 탓인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림의 귀엔 조금 전 수관 선생이 했던 말이 쟁쟁하게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소연이가 장선생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지. 장선생 이야기를 한참동안 내게 입이 마르도록 자랑스럽게 떠들어대었으니까. 아마 그 애한테는 어둠 속에서 빛이 나타난 것과도 같았을 거요.’누군가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 아프기도 하고 달콤하기도 한 것일 터였다. 하지만 훔친 사랑은 부메랑이 되어 또 다른 상처를 남기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두려움 없는 사랑이 어디 있을까. 뒤를 돌아보니 남경희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내려 깐 채 저만치서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수관 선생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무척 아프게 여겨졌을 것이었다. 평생의 소망으로 아버지와 자기를 위해 짓고자 했던 기도원의 꿈이 그에 의해 산산히 부정되어버린 탓일 것이었다.“조심하세요!” 미끄러운 길이 나타나자 하림이 큰소리로 말했다. 실재로 길이 미끄러워서가 아니라 그냥 그녀의 주의를 끌어보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다.“예.” 그녀는 비로소 고개를 들어 하림 쪽을 쳐다보았다. 하림의 눈길과 부딪히자 가볍게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자기 속을 들킨 듯한 씁쓸한 미소였다. 하림은 갑자기 수관 선생과 남경희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비록 나무와 돌처럼 무덤덤하게 대하긴 하였지만 눈빛만은 절대로 속일 수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관 선생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존경심과는 또 다른 종류의 빛남이 있었다.“아까..... 많이 실망하셨죠?”“아뇨.” 하림의 말에 그녀는 의외로 덤덤하게 대답했다.“그러실 줄 알았어요.” 그러고는 잠시 있다가,“하지만 난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누가 뭐라 하든.... 절대로!” 하고 마치 선언이라도 하듯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김영현 기자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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