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날이 이어지는 이 무렵이면 유난히 수난을 당하는 어떤 동물로 인해 우리는 생각이 복잡해지게 된다. 이 가축이 특히 여름철에 당하는 '재난'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시험에 들게 한다. 그것은 이 문명사회에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중대한 시험으로, 그것을 먹느냐 마느냐에 따라 야만인이냐 문명인이냐의 갈림길에 서게 하는 것이다. 이 동물이 인간에게 베푸는 은혜를 생각할 때 이런 '고뇌'는 참으로 마땅한 일이지만, 다만 이것이 우리 자신이 아닌 이방인에 의해 부과된 것이라는 점에서 나는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여기서 이 특별한 가축을 먹는 것에 대해 찬반을 논할 생각은 없다. 다만 오랫동안 한 사회의 역사와 문화로서 축적돼 온 식습관에 대해 함부로 야만이라고 규정하는 것의 야만성을 지적하고자 할 뿐이다. 그리고 어떤 사안에 대해 두 가지 선택 이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의 위험성을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양자택일의 획일성을 나는 육식이냐 채식이냐는 이 시대 식습관의 새로운 문제에서 또한 발견한다. 나는 채식주의자들이 갖는 동물에 대한 연민, 그 인도주의에 일단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육식과 채식, 이 둘 사이에 휴전선보다 더한 삼엄한 경계선을 그으려는 이들에 대해서는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육식에 대한 채식의 순결성을 강변하려는 일부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설명해야 할 의문이다. 과연 채식은 육식에 비해 전적으로 인도적인가. 그러나 식물은 비명을 지르지는 않지만 실은 그들도 사고를 하며 어쩌면 동물보다 더욱 고도의 감성과 지능을 갖고 있을 수 있다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식물이 겪는 고통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당신이 무엇을 먹느냐가 곧 당신이 누구인가를 말해준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고귀함과 비천함이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에서 나뉘듯, 중요한 건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다. 음식이 내게로 와서 나의 일부가 되는 것, 그 몸을 내줘 나의 살과 피가 되게 해 주는 것에 어떤 태도를 갖느냐는 것이다. 우리에게 베푸는 은총에 감사하고 그 생명의 희생을 애도하는 마음을 갖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먹는 우리와 먹히는 그들, 그 모두가 냉혹한 생태의 사슬에 함께 묶인 가련한 피조물임을 느끼는 마음인 것이다. 이것이 '견공 수난의 주간'에 우리에게 필요한 묵상이다. 이명재 사회문화부장 promes@<ⓒ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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