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산업단지<10>서울디지털산단(옛 구로공단)
1967년 구로공단 준공식에 참석해 생산제품을 보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왼쪽 두번째).
[아시아경제 이지은 기자]너무나도 그님을 사랑했기에/그리움이 변해서 사무친 미움/원한맺힌 마음에 잘못 생각해/돌이킬 수 없는 죄 저질러 놓고/뉘우치면서 울어도 때는 늦으리/때는 늦으리 (문주란, '동숙의 노래') 1966년 17세의 나이로 데뷔한 소녀 여가수 문주란의 데뷔곡 '동숙의 노래'는 동숙이라는 이름을 가진 구로공단 여공의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를 그린 노래다. 시골에서 상경해 구로공단 가발공장에서 일하며 가족과 애인 뒷바라지를 하다 버림받고 살인미수로 철창신세를 지는 그녀의 기구한 운명에 여인들은 동정과 공감을 함께 느꼈다. 1960년대 재개발에 밀려 넘어온 난민들의 거주지였던 구로가 수출산업의 메카로 떠오른 것은 수많은 '동숙이'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어 가능했다. ◇재일교포들의 열정으로 탄생한 '구로공단' = 수십층짜리 건물이 줄지어 들어서 있고, 그 건물의 층층마다 첨단기술을 다루는 ITㆍ벤처기업이 입주해 있는 곳, 바로 서울 서남부의 산업 중심지인 서울디지털단지다. 하지만 서울디지털단지도 첫 시작은 미약했다. 50여년 전, 단지가 들어서기 전 구로 일대는 서울 재개발에서 밀려난 난민들이 모여 사는 '난민촌'이었다. 난민촌을 대형 산업단지로 만들고 70년~80년대 우리 경제를 이끄는 중심축으로 키워낸 것은 바로 '우리도 뭔가 해보자'는 정신이었다. 아직 많은 7080세대들에게는 '구로공단'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서울디지털단지는 장난감 뱀 한 마리에서 시작됐다.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의 부친인 오운(五雲) 고(故) 이원만 회장이 1963년 6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의 회동에서 장난감 대나무 뱀을 흔들어대며 던진 말이 시발점이 됐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재기넘치는 말솜씨로 유명했던 그는 "일본에서 이런 것도 만드는데, 우리도 뭔가 해야 한다"며 "가내공업이라도 해서 경기를 부양하자"고 박 의장에게 건의했다. 공업단지를 만들어 경공업 제조업을 활성화시키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은 것. 60년대 초 모국으로 돌아온 재일동포 기업인들의 투자가 밑거름이 됐다. 총 면적의 90%가 국유지였던 구로지역 일대를 국가 산업단지로 조성하기로 하고 1964년 수출산업단지개발조성법을 제정했다. 1967년 1단지 준공이 완료됐고 이듬해 2단지가, 1973년 3단지가 차례로 준공됐다. 약 60만평(198만3471㎡)에 달하는 대규모였다. 입주 초기는 노동집약적인 섬유, 봉제, 가발과 전자업종 등 수출주도형 기업들이 산업단지를 이끌어나갔다. 수출액은 해가 다르게 늘어 1971년에는 국가 전체 수출규모의 10%인 1억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1980년에는 수출액이 20억달러에 육박하며 연평균 30% 이상의 수출증가율을 기록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준공식을 찾은 것은 물론 주기적으로 산업단지를 방문해 근로자들을 격려하고 수출에 힘써줄 것을 부탁했다. 구로공단의 성장에는 이원만 회장으로 대표되는 기업인들의 열정도 한몫했지만 그 뒤에는 일명 '공순이'라고 불렸던 여공들의 피와 땀이 있었다.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온 그들은 가발공장이나 봉제공장에 취직,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돈을 벌어 가족들을 부양시키는 데 힘썼다. 2~3평 남짓한 쪽방에 모여 살면서 목욕탕도 따로 없어 공동세면장을 사용하는 등 생활환경은 열악했다. 소설가 신경숙 씨가 쪽방촌에서 살며 공장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외딴방'을 쓰기도 했다. 이같은 여성 노동자들의 노고를 기리기 위해서일까, 1974년 산업단지 안에 세워진 '수출의 여인상'은 이례적으로 남성이 아닌 여성을 모델로 썼다. 최근에도 그들의 노고를 기리자는 목소리는 드높다. 서울디지털단지가 속한 구로 금천구는 디지털단지 내 여공들의 당시 삶을 재현한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을 열기도 했다.
◇쇠퇴기 겪으며 변화하는 산업단지 = 1980년대 전성기를 구가한 구로공단은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산업 구조가 변화하고 인건비가 상승하기 시작하면서 기업들이 하나둘 더 저렴한 공장터를 찾아 떠나기 시작하면서다. 국제유가 파동으로 인해 수출이 침체를 겪으면서 수출에 크게 의존했던 산업구조도 타격을 입었다. 북적였던 구로공단 내 빈 자리가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면서 '공동화' 현상을 겪기 시작했다. '변신'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도 바로 이 때다. 부가가치가 낮은 단순제조업 대신 고임금을 감당할 수 있는 고부가가치 첨단산업으로 산업구조 자체를 변화시키자는 것. 구로공단은 그렇게 서울디지털단지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한국산업단지공단은 '구로산업단지 첨단화 계획'을 통해 1997년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단지를 벤처ㆍ지식산업 중심으로 변모시켜 나갔다. 1단지에 설치된 키콕스벤처센터는 벤처업체 유치는 물론 창업보육 등 다양한 후방지원으로 벤처기업들을 흡수했다. '굴뚝 공장'으로 대변되던 구로공단은 고층빌딩과 지식산업센터들이 자리를 메웠으며 가발ㆍ봉제공장이 사라지고 반도체ㆍ이동통신ㆍ디지털 콘텐츠 관련 개발사들이 들어섰다. 2000년대 700여개사에 불과했던 입주업체 수는 2010년 현재 1만개 이상으로 증가했다.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전경.
◇다시 태어나려면 교통ㆍ복지문제 해결돼야 = 이렇듯 서울디지털단지는 경공업 단지에서 IT와 첨단산업의 메카로 다시 거듭났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고질적 문제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한국의 실리콘밸리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꽉 막힌 교통 문제가 대표적이다. 1997년부터 단지가 외형적으로는 급격하게 변화됐지만 기본적인 교통 인프라는 예전 그대로라는 게 서울디지털단지의 관리를 맡고 있는 산업단지공단의 설명이다. 김재명 산단공 고객지원팀장은 "지식산업센터들이 여러 군데 들어서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여전히 도로가 협소하고 내부 인프라가 부족하다"며 "구로에서 광명시로 넘어가는 '수출의 다리'의 경우 길이가 3.6km밖에 안 되는데 통과하는데 한 시간이나 걸릴 정도"라고 말했다. 이 문제는 몇 년 전부터 입주업체들이 입을 모아 제기했던 문제로, 여러 번 지자체에 문제를 건의했지만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일하는 삶의 질 높이기(Quality of working life)' 운동을 펼치고 있지만 아직 복지시설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김 팀장은 "1단지는 문화ㆍ복지시설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지만 3단지만 가도 옛날 제조공장 형태가 많이 남아 있어 다소 소외된 느낌을 준다"며 "각 단지에 지원시설을 늘리고 근로자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문화ㆍ복지사업이 정리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leezn@<ⓒ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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