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림 오빠 있어요?”하소연이 목소리였다. 하림은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짐짓 모르는 척 여전히 자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현관을 향해 입으로만 대답했다.“응. 소연이니.....? 들어와.”우산 접는 소리, 신발 벗는 소리. 그리고 곧이어 드르륵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서늘한 빗기와 함께 하소연이 손에 까만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갑자기 방이 환해졌다.“어서와. 비 많이 와?”“오락가락 해요. 근데 작업하시는데 방해된 것 아닌가요?”노트북을 앞에 놓고 앉아 있는 하림을 보자 소연이 잠시 주춤거리며 조심스러워진 눈빛으로 말했다. 노랑머리 끝에 빗물이 맺혀 있었다.“어따, 이 아가씨! 알고 보니 예의는 차릴 줄 아는구먼. 그런 말을 다 하시고....”하림이 놀리듯이 말했다.“피이. 아침이나 굶고 있지 않나 해서 와본 것 뿐이예요.”소연이 입술을 비죽이며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청바지 차림에 약간 두툼한 감색 털세타를 입은 모습이 첫날 봤을 때와는 달리 조금 성숙하게 느껴졌다. 노랑머리와 도톰한 가슴께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눈길이 마주치자 하림은 자기 속이 들킨 것 같아 얼른 외면을 하며,“그래도 이 골짜기에서 이 오빠 생각해주는 사람은 소연이 밖에 없구나. 눈물 난다, 눈물 나. 앉어.”하고 턱으로 테이블 건너편 의자를 가리켰다.“놀리지 마요! 근데 정말 방해된 건 아니죠?”소연이 의자에 앉으며 다시한번 조심스럽게 다짐을 한다.“물론 방해야 조금 되지. 하지만 지금은 쉬는 시간이야. 그리고 앞으로도 소연이 나타나는 시간이 바로 이 오빠가 쉬는 시간이니까 안심해도 돼. 알겠지?”“피이. 알았어요, 늙은 아저씨!” 하림이 웃으면서 하는 말에 소연이 우스꽝스럽게 코를 한번 찡긋하고는 가지고 온 비닐봉지를 부스럭거리며 담긴 것을 꺼내었다. “뭐니?”“암 것두 아니예요. 빵이랑 우유....”그래놓고 꺼내놓는 것은 빵과 우유 만이 아니고 감자칩, 비스켓, 초코 쿠키 등 과자가 잔뜩이었다.“뭘 이렇게 많이....? 야, 설마 여기다 길목수퍼 옮겨오려구 하는 건 아니겠지?”“자꾸 놀리면 나 정말 가버릴 거예요!”소연이 진짜 토라지기라도 한 양 눈을 흘겼다.“그래. 미안, 미안! 사실 나 진짜 미안해서 그런다. 지난 번 토란국도 그렇구.”“미안할 것 없어요. 시 가르쳐준다고 했으니 수업료라고 생각하세요.”소연이 딴에 냉정한 척 대답했다.“아항. 이게 그러면.....?”하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수업료라니까요.”“아, 안 돼. 안 돼! 그러면 너무 싸잖아?”하림이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손사레를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소연이 그 모습을 보고 통쾌하다는 듯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녀의 젊은 웃음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새싹처럼 싱그럽게 터져나갔다. 하얗고 가지런한 이빨이 눈부셨다. 글. 김영현/ 그림. 박건웅<ⓒ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김영현 기자 ⓒ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