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는 박정희를 낳고 박정희는 구미를 다시 낳았다

스토리가 있는 산업단지<2>구미국가산업단지

1971년 한국전자공업단지(현재의 구미국가산업단지) 기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왼쪽 4번째).

[아시아경제 이지은 기자]"우리는 금오산 기슭의/쓸모없는 낙동강변 3백50만평을/땀과 슬기 단결과 협조로써/전자공업단지를 이룩하였다/이것은 보람찬 80년대로/행하는 하나의 디딤돌/하나의 전설/잘살기를 발돋움하는/민족의지의 표현 꿈의 실현/조국근대화의 우렁찬 고동/바꿔놓은 지도 위에/찬란한 태양이/영원히 빛나리라" <박목월, 구미공단(1974)> 경상북도 구미시와 칠곡군, 김천시의 경계에 위치한 금오산을 끼고 낙동강변을 내려다보면 눈앞에 거대한 산업단지가 들어온다. 한국 전자산업의 중심지인 구미국가산업단지다. 면적만 24평방킬로미터(㎢). 내륙 최대 수준이다. 구미시는 이 땅이 모래밭이었던 40년 전만 해도 인구 2만의 작은 농업도시였다. 호미와 쟁기를 썼고 농군들이 지게로 거름을 져 나르던 농업도시가 40년만에 첨단산업이 집적된 대단지를 품은 대도시로 성장했다. 박목월 시인이 '쓸모없는 낙동강변'이라고 칭했던 땅에는 반도체 만드는 기계와 공장들이 쉴틈없이 가동한다. 인구는 50만으로 늘었고 60년대 100명 남짓했던 공장 노동자도 10만명으로 증가했다. 지난 해에는 수출 300억달러를 달성했다.  ◇대통령의 고향, 산업단지로 태동하다 = 구미시 상모동에 위치한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에는 지난 2011년 만들어진 동상이 세워져 있다. 구미 지역 사회단체가 힘을 모아 세운 이 동상은 구미 시민들의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와 애정을 드러낸다. 구미시와 구미산업단지의 발전은 박 전 대통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대통령의 고향'으로만 알려진 작은 도시 구미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구미에 대규모 섬유ㆍ전자산업단지가 지어지면서부터다. 63년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박 전 대통령은 '수출만이 살 길'이라며 국내 전자산업 육성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1969년 1월 전자공업진흥법이 제정되면서 설립추진대회가 시작됐고, 9월께 입주 1호 기업인 한국도시바(현 KEC)가 공장 설립을 시작했다. 구미 출신의 재일교포 기업인 곽태석 회장이 일본 도시바와 합작해 세운 이 회사는 농업인구가 80% 였던 당시 구미에 처음으로 전자공업을 도입했다.  정부가 구미에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게 된 것은 수출을 이끌기 위한 전자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다. 구미는 풍부한 용수와 노동력, 편리한 교통 등 내륙이지만 수출 공업단지에 적합한 조건을 갖고 있었고, 섬유산업의 대구와 연계해 전략산업으로 발전시키기도 용이했다. 중국 황사에서 자유롭다는 점도 전자산업에는 최적의 입지로 평가됐다. 하지만 대통령의 고향이라는 점은 언제나 부담으로 따라다녔다. 구미 산업단지 조성에 주된 역할을 한 이원만 코오롱 창업주의 회고록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서 고향에 산업단지가 들어서는 것을 사석에서 여러 번 반대했다고 한다.
◇섬유 중심지에서 전자로 = 공단 초기인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는 제일모직, 제일합섬, 한국폴리에스텔, 동국방직, 코오롱 등 섬유관련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섬유산업이 구미 산업단지의 핵심축이었다. 노동집약적 산업인 섬유산업이 주변 인력을 끌어들이면서 구미의 농업인구 비율은 80%에서 70%로 줄었다.  섬유 중심이었던 공단이 본격적으로 전자 산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금성사(현 LG전자), 대우전자(현 대우일렉), 삼성전자 등이 입주하면서다. 전자 대기업의 입주로 관련 부품공장들과 계열사들이 구미 산업단지로 몰려온 것. 1973년 78개사에 불과했던 입주기업들은 6년만에 207개사로 2배 이상 증가했다. 지금도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흑백TV가 주요 수출품이었다. 수출 측면에서도 전자산업은 섬유산업을 금방 넘어섰다. 1973년 2000만달러로 2400만달러였던 섬유 수출액보다 적었던 전자 수출액은 1976년 1억달러, 1980년 4억4000만달러로 성장하며 각각 8000만달러, 3억7000만달러를 기록한 섬유 수출액을 추월했다.  1982년 제2단지가 완공되면서 전자산업은 한층 업그레이드된다. 흑백이었던 TV도 컬러로 바뀌고, 반도체ㆍ컴퓨터 등 첨단산업이 구미 산업단지의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금성전자(현 LG전자), 한국오크공업(두산전자) 등 통신기기 업체와 동양나이론 등 사무용 컴퓨터 생산업체, 금성반도체 등 웨이퍼 제조업체가 들어섰고, 럭키소재(현 LG실트론)이 웨이퍼공장을 건설했다. 현재 국내 전자산업을 이끌고 있는 웬만한 대기업들이 모두 구미에서 첫 사업을 시작한 셈이다.  초기 산업단지의 부족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지자체, 산업단지공단이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그 흔한 술집 하나 없었던 시절, 평균 나이가 20~30대 초반인 젊은 구미 산업단지 임직원들의 '혈기'를 달래기 위해 업주들이 직접 야유회를 결성했고 낚시회, 족구대회, 축구대회를 열었다. 박 전 대통령은 특별명령으로 공장 안에 기숙사를 지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변변찮은 교육기관이 없다는 임직원들의 불만에 산업단지와 상공회의소 직원들이 '좋은 선생님' 모셔오기에 열을 올리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대기업들이 집적하면서 인프라가 급격하게 늘었고, 구미 산업단지에 입주한 1차, 2차 협력업체들도 급속하게 커 나갔다. 신호범 신성전자 대표는 "음식점들이 자고 일어나면 몇개씩 생겨 있었다"며 "대기업의 변화하는 요구대로 제품을 잘 만드는 업체들도 급성장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중소기업들의 대기업 의존도가 지나치게 커졌다는 점은 초기 발전의 문제로 지적된다. 신 대표는 "대만이나 일본처럼 중소기업 브랜드가 탄탄하게 자리잡지 못한 것은 대기업 위주의 하청구조가 뿌리깊게 자리잡았기 때문"이라며 "대기업들의 사업구조 변화로 인해 100여개나 되던 협력업체가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드는 일도 있었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퍼스트레이디' 시절이었던 1978년 구미를 방문해 여성들을 독려했다.

 ◇위기 헤쳐 나가려면…새로운 결단 필요 = 90년대,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구미 산업단지는 초기의 활기를 잃고 노후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라이프사이클이 짧은 전자산업의 경우 설립 40년을 맞은 노후한 산업단지로는 타국과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는 것. 구미 산업단지에 새로운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는 IT융ㆍ복합화, 외국기업 유치 등 전환점이 될 만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부담감을 갖기보다는 편견 없이 구미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 달라는 게 현지 중소기업들의 바람이다. 이정범 구미중소기업협의회 초대 회장은 "구미가 황무지에서 첨단 산업단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지도자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위기를 맞고 있는 구미를 도외시하지 말고 발전시키기 위해 과감하게 나서달라"고 촉구했다. 이지은 기자 leezn@<ⓒ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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