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관왕묘의 관우상..중화주의 산물인 이유는
[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오늘날 '중화주의'를 부활시키려는 중국의 공세가 거세다. 그저 동북공정은 작은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중화주의를 표방한 중국의 문화글로벌 정책 또한 소위 '중국 속도'만큼 공격적이다. 그 핵심에는 '공자'가 있다. 중국어 보급 및 공자 사상을 전파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 공자학원과 공자학당이다. 공자학원은 2004년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소재한 서울공자아카데미가 시초다. 전세계적으로 공자학당(공자학원 포함)은 2010년 10월까지 6년동안 96개국에 공자학원 322개와 공자학당 369개 등 총 691개가 설립된데 이어 2011년 104개국, 826개로 늘었다. 지난해 설립한 것을 포함하면 1000여개를 육박한다. 우리나라에선 서울 공자아카데미 이후 전국 곳곳에서 중국의 지원 없이도 공자학원이 속속 생겨나고 있어 '소중화' 의식마저 부활한 듯 하다. 공자는 오랫동안 우리 정신사(史)를 지배했으며, 그가 남긴 문화적 트라우마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셈이다. 공자학당의 확산을 주도하는 이는 후진타오와 시진핑이다. 2010년 후진타오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중국어 교재를 만들라"고 특별지시한 이래 중국은 공자학원 확대에 엄청난 물량 지원을 펼치는 중이다. 중국의 새 지도자 시진핑도 후진타오 못 지 않다. 2011년 12월 태국 방문시 현지 공자학원에 들른데 이어 해외 방문 시 수시로 공자학당을 찾고 있다. 시진핑은 '중화민족 부흥'을 주창할 정도로 국수적인 성격을 지녔다. 공자는 중국 유사 이래 '중화주의'의 상징적인 인물로 오랫동안 이민족에 대한 역사 문화공정의 도구로 사용돼 왔다.
이런 공자와 비견되는 인물이 관우다. 중국 명나라는 공자 사당인 문묘와 관우의 사당인 무묘를 지어 제사를 지내며 숭배해왔다. 중국 한(漢)족의 문무를 대표하는 두 사람은 오늘날 우리 땅에서도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다. 관우는 아예 우리를 지켜주는 무신(武神)이 됐다. 중화주의가 부활하는 요즘 서울 종로 숭인동에 소재한 '동관왕묘'는 우리 정신의 뿌리를 어디에 둬야할 지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한다. 동관왕묘는 흔히 '동묘'라고 부른다. 지하철 1호선 동묘역에서 내려 3번 출구를 나서면 중년들의 로데오거리인 동묘 벼룩시장이 나온다. 동묘 벼룩시장에는 웬만한 중고품이 다 있다. 심지어는 영국산 버버리코트에서부터 롤렉스시계, 각종 공구, 중고 의류, 골동품, 중고서적 등의 좌판이 즐비하다. 간혹 괜찮은 물건을 잡을 수 있어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즐겨찾는다. 동묘 벼룩시장은 궁궐 담장을 연상할만큼 고색창연한 벽돌담을 'ㄱ'자로 에워싸고 있다.
바로 벼룩시장의 담벼락 너머 거대한 전각 아래 관우가 그의 아들, 부하장군과 더불어 신으로 모셔져 있다. 그런 연유로 사학계 일부에선 관우상을 치우고 우리의 무신(武神)인 치우천황을 모셔야한다고 주장한다. 서울 동묘는 선조 32년(1599)에 착공, 2년 뒤인 1601년 완공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왜군을 물리칠 때 관우의 신령이 도왔다해서 명나라 신종으로부터 비용과 친필로 쓴 액자를 지원받아 건립됐다. 동관왕묘의 중심건물 '정전'은 두개의 건물이 앞뒤로 붙어 있다.중국 절이나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지붕은 '丁'자 모양과 '一'자 모양이 합쳐진 '工'자 모양의 팔작 지붕 형태다.정전은 제례를 위한 전실과 관우와 부하들의 조각상을 둔 분실로 나뉘어 있다. 전실과 분실을 감싼 벽돌벽 바깥에 다시 기둥을 세워 처마를 받치고 있다. 동묘는 여러 전란과 질곡속에서도 훼손되지 않아 그나마 무신으로서의 체면을 지키고 있다. 여기에 우리의 불편함이 있다. 남의 나라 장군을 신으로 오늘날까지 모시고 살아야하는 지 의문이다.
실제 정사와 소설속의 관우는 전혀 딴판이다. 명나라 나관중이 쓴 소설 '삼국지 연의'에 나오는 관우는 "술이 채 식기도 전에 화웅의 목을 베어 오고", "관도대전에서 안량과 문추의 목을 단 칼에 베고", "주군 유비를 찾아가기 위해 오관(五關)의 장수의 목을 차례로 쓰러뜨린다." 관우는 80근짜리 청룡연월도를 휘둘러 적들을 추풍낙엽처럼 날려버리는가 하면 적벽대전에서는 군율을 어기면서까지 과거에 신세를 진 조조의 목숨을 살려줄 정도로 인간미가 넘친다. 심지어는 화타에게 뼈에 박힌 독화살을 빼내는 수술을 받을 때에는 태연자약하게 바둑을 둘 만큼 인내심이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중국 진나라 진수가 쓴 정사인 '삼국지'에서는 전혀 다르다. 안량은 관우가 죽인 것은 맞으나 화웅은 손견에게, 문추는 조조군의 화살을 맞아 죽었다. 관우는 조조와 여자문제로 갈등을 벌이다 몰래 도망쳐 유비에게 돌아갔다. 오관참장에 대한 기록도 없다. 적벽대전조차 조그만 샛강에서 벌어진 한미한 전투에 지나지 않으며 조조의 회군도 전염병 때문인 것으로 적혀 있다. 삼국의 판도를 가름한 전쟁도 관도대전이다. 촉나라 또한 천하대세를 겨룰만한 세력이 못 될 정도로 중앙아시아의 작은 변방정권에 지나지 않았다.관우는 한족이 부활할 때 잠시 나타나 명맥을 유지하다 명나라 시절 공자와 더불어 신격화됐다. 명나라는 한족 계열의 정권이며 한족은 오랫동안 이민족의 지배에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바로 이들이 만들어낸 지배논리가 중화주의다. 특히 명나라와 한족은 공자를 내세워 사상적 토대를 삼고, 이민족에 대한 역사공정의 한 방편으로 관우를 신격화했다. 삼국지 연의 또한 한족의 자존심을 달래려고 지어진 가상소설이다. 중국에 관우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치우천왕이라는 군신이 있다. 치우천왕은 배달국의 14대 임금인 '환웅'으로 단군 왕검의 조상이다. 일부 사학자들이 관우 대신 치우천왕을 모시자고 하는 근거다. 중국은 1995년 동북공정 당시 북경 인근 하북성 탁록에 귀근원(歸根苑)을 건설, 그 안에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을 둬 치우천왕을 중화민족의 공동조상으로 삼아버렸다. 위만조선, 기자조선 등에 중국계 일부가 귀화, 편입된 것을 확대해 아예 우리 민족 뿌리 자체를 그들의 일부로 해석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 치우천왕은 '구려의 임금, 동이의 수령으로서 지나족의 시조인 헌원에게 대들어 반란을 일으켰던 흉포한 자'에 지나지 않았다. 관우는 요, 금, 원 등 이민족에 짓밟혀 왔던 한족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신'으로 변모, 이민족의 대륙 점령사를 공정하는 도구가 된 인물이다. 바로 청룡 연월도가 그것을 말해준다. 중국 삼국시대에는 도, 검, 창, 극이 일반적인 무기였으며 연월도는 동이(東夷)의 무기다. 특히 청룡은 동이의 수호신 중 하나다. 관우에게 청룡연월도를 쥐어준 데는 동이에 대한 역사공정의 의도가 반영된 셈이다. 중화주의가 다시 밀려드는 우리 시대에 '관우'의 망령(?)에 대한 사회적 공론은 여전히 필요하다. 일부 사학자들처럼 관우상을 치우고 치우천왕을 모실 지, 아무런 고찰 없이 그대로 보존할 지는 서울시민이 결정할 문제다.이규성 기자 peace@<ⓒ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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