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스토리]'구로 아리랑' 떠난 거리, 외인부대가 메웠다

학교 대신 공장에서 미싱 돌리며 꿈을 키운 그곳, 가리봉동을 가다

▲가리봉동 항공사진.[자료제공=구로구청]

[아시아경제 정종오 기자]]"여기는 가리봉 오거리가 아닙니다. 디지털단지 오거리입니다."지난 29일 찾은 가리봉 오거리. 여전히 다섯 갈래길은 동서남북으로 뻗어 있었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가산 디지털단지가 들어서면서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겪은 가리봉동 다섯 길은 디지털단지 오거리로 이름을 바꿨다. 가리봉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의하면 1789년 금천현 동면의 가리산리로 기록돼 있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큰 고통에 시달리기도 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그 해 7월4일부터 네 차례에 걸친 비가 748.9mm를 기록하면서 서울시 전역이 큰 피해를 입었다. 가리봉동 역시 안양천이 범람하면서 이를 피해가지 못했다. 큰 피해로 고통받고 있던 민중을 돕기 위해 그해 11월 하마련 선교사가 가리봉교회를 설립했다.

▲1970년대 당시 노동자들이 구로공단 일터로 향하고 있다.

1960년대 가리봉동은 모습을 크게 바꾼다. 가리봉동 공영 주택 건설이 박정희 정권에서 시작되면서 6.25 전쟁 이후 우후죽순으로 들어선 서울 도심 지역의 판잣집을 정리하고 구로동과 가리봉동 등 도시 외곽에 공영 주택과 간이 주택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이때 구로공단이 조성되면서 많은 공장이 들어선다. 급격한 변화의 중심에 있었던 이곳을 주제로 1978년 소설가 양귀자는 '비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를 펴냈다. 신경숙 작가의 '외딴방'에도 당시 가리봉동에서 일을 했던 주인공의 모습이 등장한다. 1995년부터 중국 동포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지금은 주민의 70% 이상이 조선족일 정도로 많이 변했다. 여기에 지난 2010년부터 서울시가 '가리봉지구 재정비 촉진계획안'을 발표하면서 지금은 굴뚝보다는 53층의 높은 빌딩이, 벌집 대신 5430 가구의 아파트가 들어섰다. 가리봉동은 근대 산업화의 공간이었다. 우리네 누나와 형들, 언니와 오빠들은 학업을 포기하고 가리봉동 인근 구로공단으로 모여들었다. 12시간 노동은 기본으로 야근과 잦은 차별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공순이ㆍ공돌이'라는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계층으로 이름 붙여져 근대화의 주인공이 됐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수출 역군'으로 포장했으나 그 이면에는 저임금과 소외의 그늘이 있었다. 가리봉동이 한국 노동운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 데는 이런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가리봉동은 노동집약산업에서 경공업, 지금은 디지털단지로 변했다. 1960~70년대 봉제공장.

구로 지역의 노동운동은 주로 구로공단을 중심으로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1960년대 이후 진행된 경제 개발 정책은 노동자의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60년대 경제 개발 기간에 급속히 진행된 산업화로 농업 인구가 공업 분야로 유입되면서 노동 인구는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만큼 생활 수준이 향상되지는 못했다. 노동 조건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고 법적인 방어막도 미흡했다. 세계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장시간을 일하면서도 손에 쥐는 임금은 초라했다. 산업 재해와 질병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여러 조건들이 자연스럽게 노동운동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1960~80년대, 5ㆍ16군사쿠데타, 계엄령, 80년 군사정권 하에서 노동조합이 해체되고 노동쟁의가 금지된 상황에서도 노조 결성과 임금 인상, 노동 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는 항의와 고발, 시위는 계속됐다.그러나 지금 가리봉동, 아니 디지털단지 오거리에서 이런 모습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여전히 주거단지는 다닥다닥 좁은 골목과 예전 집으로 이뤄져 있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은 이곳에 거주하기보다는 출퇴근하는 경우가 많다. 가리봉동에 거주하는 이들은 중국 조선족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인정은 남아 있다. 아니 예전 그대로다. 감자탕집을 운영하는 50대의 한 아주머니. 이곳에서는 감자탕이 3000원, 삽겹살 3인분에 1만원이었다. 서울 도심에서 보다 3분의1 가격에 판매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왜 이렇게 싸냐"고 물었더니 "중국 조선족이든 이곳에 사는 국민이든 아직은 질보다는 양을 더 따지는 모습"이라며 "배고픈 이들이 값싸게 넉넉하게 먹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가리봉동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박명재(81)씨는 예전의 기억을 떠올린다. 지금도 '물난리'와 '홍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무엇보다 눈길이 쏠린다는 박 씨는 가리봉동이 워낙 물이 많고 습한 지역이라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사는 동네"라고 예전 가리봉동의 모습을 전달했다.

▲허허벌판이었던 가리봉동에 1960년대 부터 공장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리봉동에서 10년 동안 작은 슈퍼를 운영해 온 61세의 주인은 "가리봉동에는 이제 아예 상권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며 "중국 조선족 등이 가리봉동에 터를 잡으면서 상권이 사라지고, 경기가 많이 죽었다"고 말했다. 점심 때 찾은 가리봉동은 실제로 길거리에 사람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한산했다.가리봉동은 1960~70년대에는 섬유, 의복, 전기ㆍ전자조립 등 노동집약산업이 많이 차지했다. 이어 1980~90년대에는 경공업 중심의 단지로 기계, 조립금속, 섬유, 화학 등 기업이 많았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첨단 IT, 지식산업 공단으로 탈바꿈해 지금은 반도체, 정보통신, 소프트웨어(SW)개발, 연구개발(R&D) 업체가 들어서 있다. 2012년 현재 첨단 기업 1만1469개가 들어서 있다. 가리봉동 오거리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 근대사의 역사를 만든 이들은 여전히 대한민국 안에서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서 있는 것이다. 가리봉동에서 점점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 동포와 외국인 노동자들은 이제 가리봉동에 새로운 표정을 입히고 있다. 가게에서 만난 한 중국인은 "조선족이냐"는 질문에 "나는 한족 출신"이라고 답했다. 35살의 그녀는 "한국은 참 좋다. 사람들도 친절하고. 신랑은 대리운전을 하고 나는 가게에서 일을 하는데 한국에 온 것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사람이 바뀌고, 국적이 바뀌고, 이름도 바뀌었지만 예전 가리봉 오거리의 온기는 사라지지 않았다.정종오 기자 ikokid@<ⓒ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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