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박정희 대통령(가운데)과 정주영 회장 부부가 단양 시멘트 공장 준공식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작가 박상하가 쓰는 재계 通史불도저 정주영, 한달만에 10만명 미군숙소 만들자 "원더풀" 연발부산으로 피난 간 이병철, 생필품 조달해 거부로 도약대구 양말공장 사장 정재호, 조방 인수해 섬유왕 등극[아시아경제 ] 해방과 더불어 한국 경제계의 판도는 크게 요동쳤다. 지금껏 불어오던 바람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화신백화점의 박흥식과 경성방직의 김연수 등 이른바 한국 자본주의의 여명기를 열었던 1세대 기업가들이 대부분 격변기에 쪼그라들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엔 일찍이 춘원 이광수가 감지하고 예언했던 '대군(大軍)', 아직은 무명의 젊은 지방 기업가에 불과한 그들이 서울로 올라와 새 둥지를 틀면서 속속 등장한다. 처음에는 상점, 철공소, 운수업, 기타 소규모 무역이나 제조업의 소꿉장난과도 같은 사업을 시작으로, 훗날 만개할 한국 자본주의를 향해 저마다 출발 선상에 나섰다. 한데 그만 6ㆍ25 한국전쟁이 터졌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쟁은 해방과 마찬가지로 누구도 예기치 못한 가운데 돌연 발발했다. 그럴 만도 했던 게 전쟁 발발 하루 전 육본 정보국은 북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한다는 보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는 바로 그 날 비상경계를 해제했다. 그 날은 주말이라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그 날 저녁의 육본 장교클럽 낙성파티에는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초청돼 밤새 술판과 탱고 블루스 등의 춤판이 벌어졌다. 그 파티는 새벽 2시, 그러니까 남침 2시간 전까지 계속됐다. 서울 시민들 또한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에 크게 놀라진 않았다. 그 이전부터 38선에서 워낙 소규모 충돌이 많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군용차가 거리를 질주하고 "3군 장병들은 빨리 원대로 복귀하라"는 마이크 소리가 요란해지면서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으나, 무슨 일인지는 통 알 길이 없었다. 오전 7시가 넘어서야 방송은 북한군이 침공해 왔다는 소식만을 간단히 전했을 따름이다. 이틀 뒤 밤 9시경, 서울중앙방송은 정부 명령에 따라 이승만이 마치 서울에서 방송하는 것처럼 꾸며서 방송을 내보냈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다름없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있고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했으니, 곧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며 안심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방송이 나갔을 땐 아승만은 벌써 특별열차를 타고 서울을 감쪽같이 빠져나간 뒤였다. 이승만과 정부 수뇌부는 이미 서울을 떠나 피난해 놓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28일 새벽 한강다리를 폭파시켰다. 뒤늦게야 피난길에 올랐던 사람들은 이 폭파로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경제계 또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깊은 나락으로 허둥지둥 빠져들었다. 경제계는 다시 한 번 크게 요동치면서 또 다른 그림을 그려나가지 않으면 안 됐다. 해방 직후 김연수는 경성방직에서 물러나며 기존의 삼양사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한데 1950년 3월 정부에서 돌연 농지개혁이 실시됐다. 이 조치로 삼양사는 그나마 남아있던 장성농장, 줄포농장, 고창농장, 영광농장, 법성농장, 손불농장 등 15만석에 달하는 농장들을 모두 정부에 넘겨줘야 했다. 삼양사의 김연수에겐 농지의 대가로 받은 지가증권과 농지개혁에서 제외된 해리염전(380ha)만이 남게 됐다. 그런 그가 북한군의 남침 소식을 들은 건 전쟁이 터진 당일 아침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38선에서 소규모 무력 충돌이 자주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치안국에 근무하고 있던 셋째아들 김상홍으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고나서야 뒤늦게 삼양사 출장소가 있는 부산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김연수는 부산출장소에서 가족 친척들과 함께 비좁은 피난생활을 해야 했다. 옷차림은 서울에서 피난 내려올 때 입었던 작업복 그대로였으며, 빛바랜 운동화가 고작이었다. 초라한 그의 차림새를 보고 주위 사람들이 민망해 할 정도였다. 더구나 그의 나이 벌써 쉰다섯이었다. 평생을 바쳐 키워온 기업과 자산을 차례대로 모두 잃은 데다, 정신적 기반이기도 한 고향의 토지마저 죄다 내놓은 뒤였다. 거기다 비록 무죄 판결을 받긴 했으나 반민특위에 체포돼 추운 겨울을 옥중에서 보내야 했다. 그런 상황 끝에 맞은 피난생활은 그에게서 자칫 삶의 의욕마저 빼앗아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김연수는 담담했다. 누군가 그의 화려했던 행적을 떠올리며 모든 것을 잃고 만 것을 한탄하기라도 하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재물이란 중한 것이지만 사람 목숨보다는 중한 것이 아니라네. 사람이 목숨을 보전하고 뜻을 잃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기회는 다시 만들 수 있다네." 그는 재기를 꿈꾸고 있었다. 지금은 전쟁 속에 갇혀 움츠러들었으나 그 날을 다짐하고 기다렸다. 박흥식은 전쟁 이튿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국방장관 신성모를 찾아갔다. 그리곤 다짜고짜 물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게 뭡니까?" "그야 무기와 탄약 같은 군수물자가 아니겠소." "신속한 해결 방법이 있습니까?" 신성모는 한숨만 내쉬었다. 미국에 긴급지원을 요청했지만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내 생각입니다만, 지금 부산에는 일본에서 필요한 광석물자가 많이 쌓여 있습니다. 그것을 일본에 먼저 주고 신속히 보급물자를 직송해오면 어떻겠습니까?" 두 사람은 구체안을 만들어 이승만에게 가져가자고 했다. 그 자리에서 무역협회, 상공부, 국방부 등 관계자들의 명단을 작성해 경무대로 달려갔다. 이승만도 즉석에서 공감하고 곧바로 추진토록 재가했다. 다음날 박흥식은 그 일을 추진하기 위해 사전에 약속한대로 국방부를 찾아갔다. 그러나 신성모는 이미 전날 오후 이승만을 따라 서울 떠난 뒤였다. 대신 채병덕 참모총장을 만나보았으나 그는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허탈한 발걸음으로 돌아온 박흥식은 회사 중역들과 사후 대책을 논의했다. 우선 화신백화점의 문을 닫고 전 직원에게 유급 휴가를 주기로 했다. 회사 중역들은 희망에 따라 자신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자고 권유해봤으나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국 가족만이 따라나선 가운데 인천으로 향했다. 며칠 전에 외자청의 입찰을 통해 수입하게 된 시멘트가 인천항에 입항되어 하역작업 중이었다. 그는 그 화물선을 타고서 부산으로 갈 심산이었다. 그러나 일본인 선원들은 그의 요청을 외면했다. 부산항에 입항하지 않은 채 곧장 일본으로 가버렸다. 서울은 그 사이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 화신백화점에 쌓여있던 재고상품(지금 돈 약 650억원)을 모조리 약탈해 갔음은 물론, 9ㆍ28 서울 수복 땐 불마저 내질러 화신백화점이 한줌 재로 화하고 건물 뼈대만이 앙상하게 남았다. 박흥식이 그런 화신백화점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서울이 수복된 뒤 두 달여가 지나서였다. 하지만 그는 절망이 아닌 희망에 부푼 모습이었다. 그가 들고 온 가방 속에는 서류가 한 뭉치였는데, 일본에 체류하고 있을 때 다각도로 검토하고 짜낸 신규 사업 계획안이었다. 그 내용은 일본에서 대규모 어선을 들여와 수산업을 크게 벌인다는 거였다. 당시만 하여도 우리의 어선 보유량이나 어업 기술은 너무나 보잘 것이 없었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어업 경쟁에서는 일본에 한참 뒤진 채였다. 더구나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잿더미 속에서도 수산업은 비교적 손쉽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미 일본의 도꾸시마수산과 논의를 한 끝에 중고선 등을 합해 약 600여 척의 어선을 들여오기로 합의까지 본 상태였다. 하지만 박흥식의 이런 꿈은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이승만이 이렇게 말한 때문이다. "일본이 박 아무개를 통해 경제침략을 하고자 하는 숨은 뜻이 있슴네다." 한편 해방 이후 정주영은 미군정으로부터 적산 땅 일부를 불하받아, 그동안 자동차 수리공장의 경험을 살려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세웠다. 이어 미군 부대를 드나들면서 현대건설사도 세웠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전쟁이 터지고 말면서 그 모든 것을 잃은 채 속절없이 부산으로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피난지 부산은 그에게 또 다른 기회의 땅이었다. 전쟁 특수로 건설 물량이 쏟아져 나왔다. 더욱이 그에겐 약간의 행운도 따라주었다. 때마침 아우 정인영이 미군 사령부의 건설 담당인 맥칼리스터 중위의 통역으로 배치됐다. 맥칼리스터 중위는 정인영에게 건설업자를 찾아오라고 지시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정주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갔다. 맥칼리스터 중위는 그를 보고 물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건설의 어느 분야인가?""건설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소.""그럼 미군 10만 명의 임시 숙소를 한 달 안에 만들 수 있겠는가?""물론 할 수 있고 말고요."휴교 중인 학교 교실을 소독한 뒤 페인트칠을 하고, 바닥에 널빤지를 깔아 천막을 쳐서 임시 숙소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정주영은 하루 3시간으로 잠을 줄여가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결국 약속한 한 달 안에 미군 10만 명의 임시 숙소를 뚝딱 만들어냈다. 정주영의 뚝심에 감동한 미군측은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와 UN사절단이 참배할 부산 UN군 묘지를 보수하는 작업에 그를 다시 불렀다. 한겨울이었던 그 때 UN군 묘지 언덕을 푸른 잔디로 깔라는 황당한 주문이었다. 참배일이 닷새 밖에 남지 않은 성황에서 그는 고심했다. 자신이 있다고 큰 소리쳤지만 막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 어쩌다 아주 우연찮게 어린 시절 고향의 겨울 들판에서 목격했던 청보리 밭을 문득 떠올렸다. 이거다, 하고 무릎을 친 그는 곧바로 트럭 30대를 동원해 가까운 농촌으로 내달렸다. 한겨울인데도 파랗게 싹을 틔운 청보리를 떠다가 UN군 묘지 언덕에 옮겨심기 시작했다. 이윽고 한겨울의 황량한 묘지 언덕이 청보리 싹의 푸른 잔디로 변해가자 미군 관계자는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감탄사를 연발하며 앞으로 미군 건설공사는 정주영의 현대건설사에 맡기겠다고 약속했다. 해방 직후 대구에서 삼성상회와 조선양조㈜를 경영하다 상경해, 삼성물산을 설립하고 무역업에 뛰어든 이병철에게도 전쟁은 시련이었다. 한창 자리를 잡아가던 삼성물산을 잃은 채 빈털터리로 피난길에 올라야만 했다. 한데 대구에 도착하자 뜻밖의 얘길 듣게 된다. 그동안 조선양조의 이익금이 3억원 가량 비축돼 있다는 것이었다. 생각지도 않은 거금을 손에 쥔 이병철은 곧 재기에 나섰다. 피난지 부산에서 옛 임직원들을 불러 모아 삼성물산을 새롭게 설립했다. 그리고 불과 1년 만에 무려 17배를 성장하는 기적과도 같은 도약을 이뤄냈다. 어떻게 된 걸까. 이병철의 육성을 들어보기로 하자. "우선 서울에서 무역을 하던 경험을 살려 가장 공급이 달리는 생필품을 하나하나 조사했는데 달리지 않는 물자가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동란과 함께 국내 물자가 잿더미로 화하고 생산 능력이 마비된 데다, 전시 인플레로 물가가 엄청나게 치솟기 시작하자 정부로서도 관민수 할 것 없이 당장 수입을 촉진시키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이 당시 부산에서의 사업 경쟁이란 자금의 동원 능력과 기동력의 싸움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금의 동원 능력에 있어서는 우리를 능가하는 상사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동력에 있어서는 삼성물산은 타사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자부한다. 경황없이 1년을 보내고 결산해보니 3억원의 밑천이 장부상으로나마 무려 17배 이상 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런 이병철보다도 더 화려하게 비상한 기업가가 있었다. 대구에서 양말 공장을 하다 소규모 삼호방직을 경영하던 정재호였다. 그는 전쟁으로 수도권의 섬유 공장들이 모두 몰락한 틈을 타 부를 쌓은 뒤, 국내 최대 방직공장인 부산의 조선방직을 인수하면서 하루아침에 섬유왕으로 떠올랐다. 물론 이러한 놀라운 성장 이면에는 이승만의 자유당 비호가 있었다. 정재호는 이후 은행의 민영화에도 뛰어들어 제일은행ㆍ제일화재보험 등을 잇달아 인수하면서, 1950년대 삼성그룹에 이어 재계 랭킹 2위를 기록하는 삼호그룹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어쨌든 전쟁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고 말았다. 김연수는 전쟁에 갇혀 움츠러들었으며, 박흥식은 꿈이 물거품으로 사라졌다. 반면에 청보리 잔디의 정주영이나 17배 도약의 이병철, 또한 수도권 공장들이 몰락한 틈을 타 조방을 잡은 정재호 같은 이에게는 분명 다시없는 기회였다. 전쟁은 이처럼 누구에게는 재앙이었으며, 또 누군가에겐 또 다른 기회를 안겨다주었다. 6ㆍ25 한국전쟁은 곧 재앙과 새로운 기회가 공존하는 시련이었던 것이다.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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