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 금융인서 와인·커피전문가로 변신한 ‘떼루아’ 김인식 사장
[사진:이코노믹리뷰 이미화 기자]
인생 2막이 풍요롭고 행복하기 위해선 인생의 질을 결정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필요하다. 와인도 그냥 익힌다고 맛있어지지는 않는다. 와인의 원료인 포도가 자라는데 영향을 주는 지리적 요소와 기후적 요소도 좋아야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포도재배법과 와인을 만드는 기술이다. 32년 금융인으로 살아오다 올해 초 은퇴한 김인식(58) 떼루아 사장은 현역시절부터 꾸준하게 준비하며 미래에 대비했다. 그리고 은퇴할 무렵 어느덧 와인과 커피전문가로 변신했다. 김 사장을 만나 '인생의 맛'을 숙성시키는 인생 2막 준비과정에 대해 들어봤다.김인식 사장은 은퇴를 3년 앞둔 지난 2010년 요리사 자격증이 있는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식 레스토랑 ‘떼루아’를 개업했다. 아내는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바리스타와 소믈리에 자격을 갖춘 김 사장은 홀 서빙을 하며 고객들에게 대접할 와인과 커피를 엄선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떼루아’는 서울 미아삼거리역 부근에 있다. 롯데백화점 미아점 후문에서 길을 건너 바로 나타나는 주택가 골목으로 50m 정도 걸어 들어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빨강·파랑·초록·노랑· 등 원색의 내부 벽을 장식하고 있는 지도와 국가명은 모두 와인 원산지를 표기한 것이라고 했다. 인테리어 공사 때 김 사장이 일일이 업자에게 주문 제작해 설치했다. 와인 원산지마다 스왈로브스키 보석을 붙여 표시하고 싶었지만 나중에 업체에 사고가 생겨 작업을 중단하는 바람에 거기까진 진행하지 못했다. 20여 평 남짓한 공간에 작은 테이블 일곱여 개, 긴 테이블과 스툴(stool)이 놓여있는 바 안쪽 천장과 선반엔 해외에서 수집한 그릇과 컵들이 색상과 형태에 따라 가지런히 장식돼 있다.와인 냉장고와 에스프레소 커피 기계와 각 나라 언어로 제작된 와인, 커피 관련 서적들이 눈길을 끈다. 취재차 가게를 방문한 시각은 오전 11시경. 가게 안은 한가로웠다. 김 사장은 자신이 좋아하는 재즈를 은은하게 틀어놓고 커피잔과 와인잔을 정리하고 있었다. 하얀 와이셔츠에 보타이를 매고 검정색 앞치마를 두르고 손님 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커피·와인 관심 많던 은행지점장, 자격증 따고 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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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사장은 소믈리에 겸 바리스타다. 그는 2010년도에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했다. 지난해엔 소믈리에 자격증도 땄다. 보통은 창업하기 전 자격증을 준비하는데 그의 경우는 조금 특별하다. 그는 창업을 먼저 한 후 필요에 의해 자격증을 딴 케이스다. 김 사장은 올해 1월에 다니던 은행을 퇴직했다. 농협 은행에서 32년을 근무했다. 주로 영업지점에서 대출업무를 맡았다. 나오기 직전엔 의정부 경기도청 2청사 지점장을 맡았다. 그는 평소 커피와 와인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자격증을 딸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일할 땐 지점장실을 찾아오는 고객들에게 특별히 핸드드립 커피를 내려 대접하는 정도로만 취미생활을 즐겼다. 와인도 업무적으로 마실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유명 브랜드 와인 브랜드와 품종 등을 간간이 익혀뒀을 뿐 창업을 위해 일부러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김 사장은 3년 전 창업을 했다. 은퇴시점이 점점 가까워 오자 그 역시 남들처럼 고민했다. 현역시절엔 억대 연봉에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은퇴’ 이후엔 보장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 수입원이 끊기면 생활은 어떻게 하나, 아직 자리를 못 잡은 자녀 걱정에 잠이 오지 않았다. 최근엔 수명도 길어지면서 노후시간도 그만큼 길어지는데 어떻게 그 시간을 보내고 생활해야 할지 막막했다. 살아온 인생보다 살아갈 인생 더 길어 소득은 필수“퇴직을 하면 2막 3막까지 내다봐야 합니다. 3막이라는 인생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보다 더 길 수가 있습니다. 앞으로 40년을 더 산다고 하면 소득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창업은 하긴 해야 하다는 마음은 갖고 있었습니다.”퇴직하기 전 3년 정도가 뭔가를 시작해보기는 좋은 시점 같았다. 그러나 뭘 해야 할지,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내와 상의했다. 처음엔 은행을 다니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따 놓은 부동산중개인 자격증이 있어 퇴직하면 부동산을 개업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아내 심옥실(53) 씨는 부동산업에 통 관심이 없었다.다른 업종을 생각해야 했다. 아내 심씨는 당시 전업주부였다. 그런데 김 사장이 은퇴 후 창업이야기를 꺼내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때부터 요리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내는 음식솜씨가 좋았다. 학원에 다닌 지 석 달 만에 한 번에 한식, 양식, 일식 요리사 자격증을 모두 따냈다. 그리고 얼마 후 음식과 관련된 장사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해왔다. 은행에서 대출업무를 20여 년이나 담당해왔던 김 사장은 은퇴 후 무리하게 창업을 했다가 실패한 경우를 자주 봤다. 그 기억을 떠올라 일단 현역에 있을 때 위험부담이 적은 업종으로 창업하면서 경과를 지켜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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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모아둔 자금을 까먹지 않는 선에서 일단 시작해보고 실패해도 타격이 크지 않은 범위 안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약 3000만원을 들여 떡볶이집이나 분식집을 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창업을 준비하면서 생각이 변했다. 아내처럼 기왕이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은퇴 후 창업으로 연결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아내의 관심사인 요리와도 관련이 있는 분야면 창업 후에 부부가 함께할 수 있겠다 싶었다. 커피와 와인과 어울리는 요리를 만드는 음식점으로 이탈리아 레스토랑이 떠올랐다. ‘이거다’ 싶었고 즉시 준비해 2010년도에 가게를 오픈했다. 아내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그는 홀 서빙과 와인, 커피 판매를 담당하기로 했다.자금은 미리 저축해뒀던 여유자금과 일부 대출금으로 충당했다. 액수는 인테리어, 월세보증금 등을 포함해 약 1억2000만원 정도가 소요됐다. 창업 당시엔 은행에 재직 중이었기 때문에 고정적인 수입으로 생활에 지장을 받지 않았지만 창업 초창기만 해도 손님이 너무 없어 6개월간은 월급 일부를 떼어 인건비로 돌려막아야 했다. 당연히 적자였다.퇴직 후 창업은 위험부담 큰일 적절한 분산 필요“퇴직하고 창업을 하는 일은 리스크가 큽니다. 잘 되면 괜찮지만 실패하면 인생 끝나는 거죠. 보통은 퇴직금 1~2억원 받아서 대출받고 2~3억 들여서 커피숍 하다 망하는 사례도 많이 봤어요. 위험부담을 줄이는 일이 은퇴 후 창업의 성공조건 중 하나라고 봅니다.”김 사장은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 위험요소를 분산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바로 아침, 점심, 저녁 등 ‘쓰리타임’ 장사였다. 장사가 잘 안되더라도 하루에 한때라도 장사가 잘되면 유지는 할 수 있을 거란 판단이 들었다. 평소 부지런한 성격과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가진 그는 새벽 4시면 일어나서 주먹밥과 김밥, 샌드위치 등 간편한 아침식사거리를 만들어 길가에 나가 팔았다. 그리고 오전에 가게로 돌아와 문을 열고 청소를 한 후 점심때엔 식사를 주로 만들어 판매했다. 저녁땐 와인과 커피, 식사류를 모두 파는 와인 레스토랑으로 변모했다.그러나 부부가 이렇게 생활하다 보니 잠이 부족해졌다. 회사를 나온 지난 1월까지 김 사장은 낮엔 은행업무를 새벽과 저녁 시간대엔 레스토랑 업무를 해야 했다. 몸이 많이 피곤했다. 노후를 건강하고 풍족하게 살고자 창업을 했는데 왠지 맞지 않은 것 같았다.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건강을 선택하기로 하고 점심 장사는 과감하게 접었다. 두 번째로 김 사장은 전문성을 갖춰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내가 워낙 음식솜씨가 좋았고 본인 역시 커피와 와인에선 수준급의 지식과 경험을 갖췄지만 장사를 시작한 이상 고객들과 깊은 신뢰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자격증을 따기로 했다. 우선 바리스타가 되기 위해 학원을 등록해 3개월간 수강하며 커피만들기 이론교육과 실습을 모두 거쳤다. 오래전부터 커피 관련 서적을 취미로 많이 읽어둔 덕분에 필기시험은 어렵지 않았다. 실기는 조금 까다롭긴 했지만 틈틈이 남는 시간 연습한 결과 시험에 합격하는데 무리는 없었다. 와인 자격증을 따기도 어렵진 않았다. 역시 평소 틈틈이 공부해온 덕분이다. 소믈리에의 경우엔 와인브랜드명과 산지명칭, 와인생산농가 이름까지 외울 게 많다. 더군다나 명칭도 지역의 언어에 따라 모두 다르므로 공부하기가 까다롭다. 김 사장은 일일이 책에 줄을 치고 메모를 해가며 공부를 했다. 메모만큼 확실한 기억은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10년간 더 일하고 이후엔 또 다른 인생 3막 계획두 부부가 쟁쟁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 만큼 이들이 만드는 요리와 음료의 맛과 질은 최상급이다. 커피는 김 사장이 직접 만드는 핸드드립 커피가 일품이다. 지점장 시절부터 고객들에게 직접 커피를 만들어 대접하며 인정받아온 맛이니 오죽하겠는가. 와인도 김 사장이 직접 공수해와 장인의 노하우로 보관해왔기 때문에 맛이 살아있다. 게다가 입담 좋은 김 사장 덕분에 와인과 커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정보를 접할 수 있어 마니아들이 많이 찾는다. 또한, 부인 심씨가 싱싱한 해물과 자체 개발한 특제소스로 만드는 해물크림스파게티와 돈가스, 샐러드류는 맛 칼럼리스트나 파워 블로거들도 일부러 찾아와 맛볼 정도로 입소문이 자자한 효자 메뉴다. 자연스럽게 단골도 생겼고 매출도 조금씩 증가했다. 물론 대박이 난 건 아니다. 사람 하나 쓸 정도의 인건비를 겨우 남기는 수준이다.김 사장은 “위험 요소가 있긴 하지만 창업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생활비도 벌고 같은 취미를 가진 동호인들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커피와 와인이이라는 공통의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둘씩 찾아오고 대화를 나누면서 무료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창업한지 3년째를 맞았지만 김 사장은 전혀 급한 기색이 없다. 그는 지금의 일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되도록 ‘오랫동안 버티기’ 작전으로 지속해 가다는 계획이다. “10년 정도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지금은 부부가 일하느라 좋아하는 문화생활할 시간도 전혀 없지만 지금 아니면 언제 일합니까. 건강이 허락하고 일을 할 수 있을 때 해야 하죠. 그동안 열심히 일하고 사업도 커져 돈도 많이 벌고 나면 가족이나 관리자에게 맡기고 향후 10년간은 여행도 하고 그동안 못했던 문화생활도 즐기면서 행복한 노후를 보내는 게 제 꿈입니다.”와인이 맛이 좋으려면 숙성과 저장 과정에서 관리가 잘 돼야 한다. 그윽한 향의 핸드드립커피는 커피를 만드는 사람이 정성껏 커피를 내려야 만들어진다. 은퇴와 인생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은퇴 후에도 잘 살겠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알뜰하게 보살피고 가꾸는 김 사장 부부의 삶에서 잘 관리된 좋은 와인과 커피의 향미가 느껴졌다.이코노믹 리뷰 김은경 기자 kekisa@<ⓒ 이코노믹 리뷰(er.asiae.co.kr) - 리더를 위한 고품격 시사경제주간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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