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저詩]박정대 '장만옥'

멀리 가는 길 위에 네가 있다 바람 불어 창문들 우연의 음악을 연주하는 그 골목길에 꽃잎 진 복숭아나무 푸른 잎처럼 너는 있다 어느 날은 잠에서 깨어나 오래도록 네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랑은 나뭇잎에 적은 글처럼 바람 속에 오고 가는 것 때로 생의 서랍 속에 켜켜이 묻혀 있다가 구랍의 달처럼 참 많은 기억을 데불고 떠오르기도 하는 것 멀리 가려다 쉬고 싶은 길 위에 문득 너는 있다 꽃잎 진 복숭아나무들이 긴 목책을 이루어 푸른 잎들이 오래도록 너를 읽고 있는 곳에 꽃잎 진 내 청춘의 감옥, 복숭아나무 그 긴 목책 속에 ■‘화양연화’는 영화가 아니라, 내가 살아낸 어느 삶의 골목같다. 어두운 거리와 낡은 계단, 그리고 장만옥이 입은 화려한 치파오(旗袍)가 꿈 속처럼 지나갔다. 이 영화를 이미 본 것을 잊고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장만옥의 인상적인 가슴을 보면서 구면임을 기억해냈다. 꽉 조여드는 옷에 빳빳하게 긴장해있는 듯한 가슴이 여인의 고독과 자존심을 여미기라도 하듯 빈틈없는 팽팽함으로 여전히 스크린에 꽉 차 있었다. 슬쩍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장만옥의 사진 몇 장을 인터넷에서 훔쳐보니, 그녀의 가슴은 오히려 겸손하고 태없다. 화양연화(花樣華)는 "꽃같은 시절의 아름다움"이란 의미이다. 그 말은 장만옥의 치파오와 침실을 장식한 벽지(壁紙)에서 보았던 꽃무늬들을 떠올린다. 너무 화려해서 가짜인 듯한 꽃시절의 아름다움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자리는 불륜이다. 무뚝뚝한 의문이지만, 왜 왕가위 감독은 남자의 아내와 여자의 남편의 얼굴을 끝내 보여주지 않았을까. 장만옥의 사랑을 토르소로 보여주려는 의지는 아니었을까. .이상국 기자 isomis@<ⓒ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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