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 class="blockquote">류정한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배우는 작품으로 얘기해야 한다.”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다양하고 드라마틱한 인물을 주로 연기해왔던 그는 셔터 소리가 갱신될 때마다 20여 개의 인물을 소환해냈다. 여유로운 미소로 <아가씨와 건달들>의 스카이가 되었다가, 어느 순간에는 서늘한 눈의 <쓰릴 미> 속 ‘나’가 되어 있었다. 환히 웃을 때는 <넌센스 잼보리>의 버질 신부였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정면을 응시할 때는 정의를 외치는 <맨 오브 라만차>의 돈키호테였다. 하지만 그런 류정한이 가장 흥미로웠던 순간은 사진촬영 막바지 수줍게 “저 준비해온 거 있는데 같이 찍어도 돼요?”라며 ‘건승정한’ 플래카드를 꺼내던 때였다. 악을 처단하고 복수를 위해 포효하던, 뮤지컬무대에서만큼은 ‘카리스마’라는 단어가 마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던 류정한의 수줍음이라니!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랜 시간 오롯이 뮤지컬 하나만을 고집하며 살아온 자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 여전히 연기하고, 발언하고, 행동하는 류정한의 러브레터가 여기 있다.
올 4월 <몬테크리스토> 이후 무대에서 보기 어려웠는데 어떻게 지냈나.류정한: 테너 배재철의 이야기를 다룬 <기적>이라는 영화에 출연하기로 했었는데, 촬영이 딜레이 되면서 의도치 않게 6-7개월을 쉬게 됐다. 작정하고 쉰 적은 있어도 이런 경험은 없었기 때문에 처음엔 스트레스가 굉장히 많았다. 하지만 정작 무대에 서고 싶을 때 설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보니 ‘내가 이걸 이만큼 좋아했구나’라는 것도 새삼 다시 느끼게 됐다. 지금은 18일에 열리는 팬클럽 ‘건승정한’ 10주년 콘서트에 총연출로 참여하고 있다.<H3>“건승정한은 뮤지컬 팬클럽 사이에서 기준이 되어온 것 같다”</H3>
팬클럽 창단 1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이라는 점, 특별손님이 아닌 총연출로 참여한다는 것들이 신기하다. 류정한: 5년 전 데뷔 10주년 콘서트를 하려고 했었다. 다행히도 극장마다 아주 파격적인 조건으로 제안을 해주셨는데, ‘좀 건방지지 않나’ 라는 생각도 있고 나중에 한 20년쯤 되면 부끄럽지 않겠다 싶어서 일단 포기 했다. 올해 팬클럽 10주년이 되면서 그 얘기가 다시 나왔는데 생각을 바꿨다. 당신들이 했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이게 어쨌건 표를 팔아서 하는 공연이다. 처음 리허설을 갔을 땐 이거 아니야, 너네 이렇게 하면 욕먹어 막 이랬다. 내 생각만 한 거지. 이게 안 돼? 왜 안 돼? 이러고. (웃음)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리야 업이니까 아침부터 연습하지만 그 친구들은 그렇지 않잖아. 아마 영화를 원래대로 찍었다면 그 일이 얼마나 힘든지 나도 잘 몰랐을 거다. 그래서 총연출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조언을 해주고 참여를 북돋는 정도로 관여하고 있다. 특별히 자신이 아닌 그들에게로 방향 선회를 한 이유가 있었나.류정한: 2001년에 건승정한이 생겼고, 집에 컴퓨터가 없어서 PC방 가서 봤는데 누가 막 후기를 써놓고 그랬더라. 너무 충격이었고, 그래서 독수리타법으로 답글을 다 달았었다. 그렇게 시작한 모임이 10년째다. 계속 건승정한이 팬클럽이 아닌 뮤지컬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나도 나중에 공연하지 않게 되면 단관 다니면서 좋은 공연 보고 후기도 쓰고 재밌게 지내고 싶다. 그래서 되도록 건승정한에서는 내 색을 빼려고 해왔고, 큰 사고 없이 뮤지컬 팬클럽 사이에서도 기준이 되어온 것 같다. 10년, 아주 아주 뿌듯하다. 뮤지컬시장이 커지면서 팬클럽 수도, 프로 못지않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도 많아졌다. 하지만 그렇게 보고 느끼는 것과 달리 스스로 직접 공연을 준비하면서 무대에 서는 게 얼마나 힘들고 재밌는 일인지를 알게 하고 싶었다. 다른 팬클럽 역시 이 공연을 보고 ‘배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나도 즐겨보고 싶다’라는 걸 느꼈으면 좋겠고. 사진 찍을 때 ‘건승정한’ 플래카드를 꺼내서 놀랐다. (웃음) 단순한 팬이 아닌 동료로 보는 것 같은데 그들과는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하는 편인가.류정한: 할 얘기가 너무 많지만 시장에 대한 얘기를 팬들에게 전혀 하지 않는다. 어쨌건 나를 좋아해서 모인 사람들인 만큼 내가 얘기를 하면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래서 배우생활 하는 동안에는 되도록 공연으로 보여주겠다고 얘기했다. 차 한잔하면서, 술 한잔하면서 할 수 있는 얘기가 다른 것처럼 내가 초이스 하는 공연들에는 분명히 각기 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 작품들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 초연작을 주로 하며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해왔다. 그런 선택이 작품의 다양성이나 관객 눈높이에 기여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 내년에 하는 또 다른 초연, <엘리자벳>을 통해서는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나.류정한: 굉장히 방대한 작품인데, 우리나라 <명성황후> 같은 거라고 보면 될 거다. 처음엔 오스트리아 황후 얘기를 굳이 우리나라에서 해야 되나 싶었다. 그런데 상황과 나라, 옷만 바뀔 뿐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다 비슷하다. 부조리나 정의 같은 것들. <스위니 토드>도 그렇고, <맨 오브 라만차>도 그랬다. <엘리자벳>도 마찬가지다. 엘리자벳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그 안에 각자의 캐릭터가 살아 있고, 그로 인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리자벳>은 사실 여성 원톱 뮤지컬이다. 데뷔 때부터 줄곧 주인공을 맡아왔던 류정한으로서는 새로운 시도이지 않나.류정한: 내가 맡은 ‘죽음(Tod)’은 등장을 많이 하고 적게 하고를 떠나서 관객에게 많은 걸 제시해주는 캐릭터다. 눈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일 수도,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존재일 수도 있는 캐릭터라서 굉장히 매력적이다. 그리고 서브는 2003년 <킹앤아이> 이후 처음인데, 이 작품은 정말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지금 시장이 너무 편향적인 부분이 있어 국내에서 공연되는 많은 뮤지컬 중 여배우 원톱인 작품이 별로 없다. <엘리자벳>, <에비타> 같은 공연이 잘 돼서 여배우 혼자서도 극을 이끌어갈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옆에서 서포트를 잘 해줘야 된다. 그들이 빛나게.<H3>“요즘 부쩍 더 연기에 맞는 노래를 해야 된다는 걸 느낀다”</H3>
판타지적 요소도 많은 토드는 류정한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다.류정한: 근데 뭐 류정한이 그렇지, 그럴 수도 있다. (웃음) 코미디를 하건 비극을 하건 류정한이 하는 거니까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거다. 초연 때는 그래서 더 신중히 하게 된다. 라이선스의 경우 영상이 있으면 한 번은 보는데 그 뒤로는 절대 보지 않는다. 대본 가지고 싸우지. 그래서 영상에서 보는 외국배우 연기와 내가 하는 연기가 다를 수도 있다. <스위니 토드>도 외국영상을 미리 접하고 내 공연을 본 관객들은 무슨 스위니 토드가 이렇게 약하냐는 얘기를 많이 했다. 그런 광기 어린 연기,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본 스위니 토드는 인간이지,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그가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슬픈 사람을 연기하고 싶었다. 데뷔 15년 차에도 여전히 지치지 않고 더 잘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동력이 뭔가.류정한: 옛날에 좋아했던 찬송가가 있다. 내일 일은 남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안 돼요. 아하하하. 초등학교 때 꿈이 슈퍼마켓 주인하고 오토바이 가스 배달부였다. 그 이후로는 꿈이 없었다. 뮤지컬도 성악도 내가 하고 싶어서 시작하지 않았다. 그냥 물 흐르듯 이렇게 왔다. 사실 배우가 진짜 나한테 맞는 옷인가를 계속 질문해왔다. 난 항상 공연하는 게 부담스럽고, 즐거워서 해본 적이 별로 없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돈 번다고 부러워한다. 그런데 왜 이걸 계속하는지 생각해보니 이것만큼 나를 긴장시키는 일이 없더라. 옛날엔 그 긴장이 싫고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그 긴장 자체, 두려워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움일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2시간 동안 공연할 체력이 안 돼서 공연을 못 하는 상황이 되면 그때는 더 알게 되겠지. 그동안 내가 해왔던 일들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했는지. 지금도 배워가는 것 같다. 클래식으로 시작해 뮤지컬로 옮겨왔는데, 연기적인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다.류정한: 처음엔 절대 아니었다. 연기는 아예 안 해도 되고 노래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아주 많이 바뀌었다. 옛날에는 음표 하나하나 다 정확하게 맞춰서 노래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연기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런 걸 놓았다. 노래를 누가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성악적 발성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주 거칠지만 록적인 요소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목소리의 매력, 그 역할에 얼마나 어울리는 목소리인가가 더 중요하다. 노래도 연기도 객관적 순위를 매길 수 없다. 연기에 맞는 노래를 해야 된다는 생각을 요즘 부쩍 더 많이 한다. 연기에 맞는 노래란 무엇일까.류정한: 뮤지컬넘버는 대사다. 특히 선율이 좋으면 그만큼 가사, 즉 그 캐릭터의 대사와 감정이 중요하다는 거다. 그런 상황에서 노래하려고 덤벼들면 사람들이 노래를 듣지, 감정을 느낄 수 없다. 감정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정확한 발성을 써야 되고, 딕션이 안 좋으면 선율적으로 노래를 아무리 잘해도 다 소용없다. 소극장에서는 툭툭 던져도 다 들리지만 대극장에서는 조금 부담스럽더라도 정확하게 발음해야 한다.<10 아시아>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0 아시아 글. 장경진 three@10 아시아 사진. 이진혁 eleven@<ⓒ즐거움의 공장 "10 아시아" (10.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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