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하늘 “시각장애 연기, 혼자와의 외로운 싸움이었다”

<div class="blockquote">김하늘은 이름만큼이나 맑고 화사한 인상을 남긴다. “로맨틱 코미디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칭한 장근석의 표현도 약간의 과장만 빼면 반박의 여지가 없다. 멀게는 <동갑내기 과외하기>와 <그녀를 믿지 마세요>에서 가깝게는 <7급 공무원>까지 김하늘이라는 배우의 요체는 ‘웃음’이었다. 김하늘의 13년 연기 인생을 지탱하게 해준 힘이 그것만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영화 <블라인드>는 웃음을 걷어낸 김하늘이 마초들의 격전지인 ‘살인마 스릴러’ 장르에서도 유효한 배우임을 증명한 작품이다. 순간의 실수로 경찰 배지도, 사랑하는 동생도, 세상을 보는 눈도 잃어버린 민수아가 김하늘의 새 이름이다. 시각장애 연기를 준비하는 과정이 “말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는 김하늘은 책과 스크린, 시각장애인 학교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거쳐 수아를 완성해냈다. 뺑소니 사건의 증인으로 나선 수아가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최선을 다한 나 자신을 보듬어주고 싶다”는 김하늘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이게 된다. 외로운 싸움을 끝낸 심정, 보이지 않아도 보인다.
<H3>“시각장애 연기, 말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H3>
매번 작품 홍보에 열심이다. 에너지와 열정이 보통이 아니다.김하늘: 힘들 때도 있지만 책임감을 떠나 애정을 갖고 하게 된다. 최근 들어 연기나 홍보에 있어서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부쩍 어른스러워진 듯하다.김하늘: 어떤 일이건 지치고 힘들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땐 예민해지고 짜증이나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런데 점점 자제하게 된다. 요즘 많이 느끼는 건데, 여유로워졌다. 온화해졌다고 해야 하나. 스스로 그렇게 변하려고 하는 걸 많이 발견하게 된다. 예전에는 여성적인 이미지가 강했는데 요즘엔 그보다 중성적인 면이 강해진 것 같다. 터프해졌달까.김하늘: 역할 탓이라기보다는 배우 생활 하는 데 있어서 그게 더 편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내가 매우 여성적인 모습으로 다소곳하게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 한다. 그래서 더 활기차게 하려고 한다. 김하늘이라는 배우는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느낌이었다.김하늘: 지금도 그런 면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잠깐이라도 나를 만나게 된 분들은 예전보다 더 편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전엔 다가가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 말도 잘 안 할 것 같고 내성적일 것 같다는 것이다. 예전엔 그런 편이기도 했다. 어떤 직업이건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는 건 좋지 않은 일인 것 같다. 특히 배우는 시선을 받는 직업이다. 주연배우 한 명으로 인해 분위기가 좌지우지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 감정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기 힘들다. 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때문이라도 기왕이면 유쾌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쓴다. 그렇게 하면서 내가 에너지를 받기도 하고 긍정적으로 변하기도 했지만 가끔 그런 노력 때문에 힘든 것도 사실이다. 영화 <블라인드>의 어떤 부분이 흥미로웠나.김하늘: 시각장애를 가진 여자가 살인사건의 목격자가 되는데 이걸 어떻게 풀어갈까 궁금했다. 그 점이 흥미로웠다. 내가 관객이거나 관계자라면 어떻게 풀어냈을지 궁금할 것 같다.
시각장애인 연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김하늘: 말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내가 연기를 잘해야 하는 건 두 번째고 첫 번째로는 그분들께 누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어차피 나는 연기를 할 수밖에 없다. 다른 캐릭터라면 ‘연기를 했다’가 아니라 ‘그 인물이 됐다’고 하는 게 편했다. 내가 맡은 캐릭터 안에 들어가 내 안에 있는 상황들, 장단점을 끄집어내서 그 인물과 만나면 된다. 그렇지만 시각장애는 캐릭터가 아니라 물리적인 조건이기 때문에 그 위에 뭔가를 덧붙여야 했다. 많은 부분을 고민하고 연구해야 했고 채찍질해야 했다.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할지 고민이 됐다. 그래서 시각장애를 가진 분들을 계속 만났고 모르던 것들도 배웠다. 영화나 다큐멘터리도 많이 봤고 관찰도 많이 했다. 우선은 가능한 모든 것을 시도했다. 그 다음에야 민수아라는 인물에 다가갔다. 그래야 스스로도 최선을 다했다고 나 자신을 보듬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준비했나. 김하늘: 두 달 정도 준비하면서 한 달은 시각장애인 학교에 다녔다. 가장 도움이 됐던 건 두 권의 책이었다. <손끝으로 보는 세상>과 <기꺼이 길을 잃어라>였다. <기꺼이 길을 잃어라>는 연기 때문이 아니라도 보기에 좋은 책이었다. 실존 인물이 소설처럼 쓴 건데 시각장애인이라는 마음가짐에 있어서나 감성적인 부분을 채워줬다. <손끝으로 보는 세상>은 시각장애인의 심리적인 면을 현실적으로 잘 설명한 책이다.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디테일을 알려주더라. 이를테면 우리가 생각하는 배려와 그들에게 필요한 배려가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흥미로운 점들이 많았고 또 놀라웠다. 몸 동작이나 눈동자의 움직임 등을 연기하는 건 어땠나.김하늘: 눈을 가리고 걸어보기도 하고 계단도 걸어봤다. 눈을 가리면 시각장애인과 똑같은 거잖나. 하다 보니 습득이 되더라. 눈이 보이는 상황에서 걷는 것과 안 보이는 상황에서 걷는 건 확연히 다르다. 눈이 안 보이면 엉덩이가 뒤로 빠지고 손이 먼저 나가게 된다. 현장에 가면 눈을 가리고 미리 연기를 해본다. 배우라 그런지 몸이 기억한다. 그렇지만 눈 연기는 어려웠다. 시각장애인들과 만나서 대화하고 식사하면서 디테일을 관찰하고 연구했다. 대개 시각장애인은 눈동자의 방향이 어긋나 있다. 눈동자를 잡아주는 근육이 손상돼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무척 힘든 일이지만 운동을 해서 눈동자를 움직이시는 분들도 있다. 수아는 그런 분들을 모델로 한 캐릭터다. 촬영 중에는 시각장애인처럼 촉각이 예민해지기도 했다. 촬영 전에 체험 전시 < Dialogue in the Dark: 어둠 속의 대화 >에서 2시간 정도 체험했는데, 그때 느낀 촉각이 대단했다. 연기에 대한 성취감을 떠나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내가 두려운 걸 해냈다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영화 <여인의 향기>의 알 파치노나 <어두워질 때까지>의 오드리 헵번의 연기도 참고했나.김하늘: 그렇다. 두 배우 모두 시각장애를 갖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연기한 거니까 그분들의 연기도 자세히 봤다. 안상훈 감독이 말하길 시각장애인도 눈을 마주치고 싶어 한다고 하더라. 안 감독에게 자연스럽게 연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경계선을 어떻게 설정할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H3>“혼자와의 외로운 싸움을 끝낸 느낌이다”</H3>
힘든 만큼 영화에 대한 성취감도 크지 않나.김하늘: 만족감도 있고 기대감도 있다. 설레기도 한다. 촬영 끝나는 날 소리를 질렀다. 나 자신에게 수고했다고 칭찬해주고 싶었다. 혼자와의 싸움을 끝낸 것 같았다. 다른 작품과 너무 달랐으니까. 나 혼자 싸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연기할 때는 감독뿐만 아니라 스태프들도 모두 관객이 돼버리니까. 디테일한 걸 파고드는 건 결국 내가 다 해야 하는 일이었다. MBC 드라마 <로드 넘버원>과 <블라인드>는 만족감이 매우 높은 작품인 듯하다.김하늘: 그렇다. 두 작품에 갖는 만족감이 크다. <블라인드>는 그런 기분을 오래 느끼기도 전에 새 영화 <너는 펫> 촬영에 들어가서 좀 아쉽기도 하다. 잊고 있었는데 인터뷰를 하면서 다시 생각이 난다. <로드 넘버원>은 감정적인 몰입도가 굉장히 강했고, <블라인드>는 많은 부분을 생각해야 하는 캐릭터였다. <블라인드>의 수아는 다른 어떤 캐릭터와도 비교가 안 될 만큼 달랐다. ‘1박2일’에 출연했다. 반응이 어땠던 것 같나. 김하늘: ‘1박2일’ 덕에 대중과 많이 친근해졌다. 언니 삼고 싶다거나 같이 놀러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나보다. 사실 일반 분들과 만날 계기가 없어서 ‘1박2일’ 출연이 내게 어떤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인터뷰 때문에 만난 기자들만 봐도 그걸 보고 나서 편한 마음으로 오게 됐다는 말을 많이 하더라. ‘1박2일’에 나가서 실제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해 걱정을 전혀 안 한 건 아니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런 모습도 금세 잊어버릴 것 같다.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H3>“주위의 소소한 행복을 챙기고 싶다”</H3>
토크쇼에 출연하는 것처럼 연기가 아닌 실제 ‘나’를 보여주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다.김하늘: 그렇다. ‘1박2일’은 잠깐이니까 보여줄 순 있다. 그러나 어떤 데서라도 있는 그대로 나를 보여줄 수는 없을 것 같다. ‘1박2일’은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라 토크쇼와는 다르다.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창구도 없고, 시청자들이 그대로 나를 받아들일 것 같지도 않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뭐가 중요한가 싶기도 하다. 늘 카메라 앞에서 작품 속 캐릭터로 살았던 사람인데 ‘난 이런 사람이다’ 하고 보여주는 것 자체가 낯설고 겁이 난다. ‘1박2일’은 길게 찍는 프로그램이니까 가능했지 다른 예능은 힘들었을 것 같다. 배우가 아닌 자연인 김하늘이 가장 신경 쓰는 건 어떤 건가.김하늘: 주변의 소소한 행복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연기할 때만 빼면 난 별로 변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친구들을 만날 때도 그렇고 별로 연기자라는 느낌을 갖지 않고 산다. 친구들 만날 땐 내가 힘든 일을 더 하기도 한다. 그게 나는 좋다. 연기할 때만 빼면 나사를 확 풀어놓은 느낌이다. 몹시 느리다. 20대 초반에 데뷔했을 때는 현장에서 가장 어렸고, 신인이었다. 그때는 ‘나중에 선배가 되면 후배도 챙겨야 하고 나이 든 역할도 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없어지고 현실에 만족하게 되더라. 그게 나도 신기하다. 연기의 폭이 넓어지고 연륜이 쌓이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그간 내가 하고 싶었던 작품을 잘 만나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중에 더 나이 들고 맡게 될 캐릭터 중에서도 매력적인 인물이 많을 것 같다.
10 아시아 글. 고경석 기자 kave@10 아시아 사진. 이진혁 eleven@<ⓒ즐거움의 공장 "10 아시아" (10.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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