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안 식당 | ‘파우자’ 강성영 셰프
저는 광고 일을 하면서 신바람과 감흥을 느꼈습니다. 다시 한 번 그 신바람과 감흥의 맛을 일깨워준 게 바로 요리예요. 그래서 요리사로서의 직업이 힘들지도 않죠. [사진:이코노믹리뷰 안영준 기자]
20년 스타 광고장이 접고 50세에 터득한 요리 철학 따스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봄날 오후, 서울 서교동 홍대거리에 자리 잡은 작은 이탈리안 음식점. 이곳에서 강성영(52)씨는 새로운 인생길을 걷고 있다. 그저 번듯한 식당 사장으로서만이 아니다. 짧고 희끗희끗한 머리를 한 훤칠한 이 남자. 쉰 살이 넘어 ‘이탈리아 음식 요리사’란 타이틀을 달았다. 경력 3년차에 접어든 아직은 신참내기지만 어엿한 스페셜리스트다. 싱싱하고 좋은 재료가 ‘경쟁력’그가 깨친 ‘하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광고계를 주름 잡던 최고 자리에서 과감히 내려와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밑바닥부터 시작해 꿈을 일궜다. 그렇다. 나이가 무슨 상관있으랴. 위풍당당 두 번째 인생을 개척해 나가고 있는 강 셰프의 열정 레시피가 알고 싶어졌다. 이탈리아 말로 ‘쉰다’는 뜻의 ‘파우자(Pausa)’. 강 셰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 이름이다. 멋스러운 야외 테라스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25평 남짓한 아담한 공간이 펼쳐진다. 흰색 천장과 벽, 따뜻한 원목 식탁에 집에서 만든 것 같은 알록달록한 헝겊 테이블보, 와인 그리고 꽃과 나무들…, 단순함, 정겨움, 편안함이 한데 어우러진 느낌을 준다. 강 셰프를 만나러 갔을 때, 점심 타임이 끝난 무렵이라 식자재를 사기 위해 외출 중이었다. 잠시 후 양손 가득 무거운 재료 보따리를 들고 나타난 그. “채소와 해물은 직접 보고 눈으로 확인해 깐깐하게 고르죠. 손님은 돈을 주고 사서 드시는 건데 맛은 좀 떨어지더라도 몸에 나쁜 재료들을 쓰지 말자는 게 제 원칙입니다.”늘 좋은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데 공을 들인다. 원재료의 담백함과 더불어 소스와 면의 조화까지 생각한다. “신선도에 따라 생선탕의 운명도 갈린다고 하죠? 상태가 좋으면 지리, 나쁘면 매운탕. 소스 맛이 너무 강하면 좋은 재료를 살릴 수가 없어요. 제가 요리 경력이 짧은 탓에 별로인 재료를 가지고 훌륭한 음식을 만들 재주는 없거든요.” 사람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정직해야 한다는 신념이 깔려 있다. 그래서 파우자의 음식은 솔직하고 소박하다. “거처가 홍대 주변이여서 파우자에 대한 입소문은 익히 듣고 왔다”고 하자 수줍은 듯 겸손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이곳의 메뉴는 애피타이저와 샐러드, 파스타, 피자, 스테이크, 디저트를 포함해 대략 27가지. 그 중 인기 종목은 파스타. 비결은 생면이다. “보통 파스타에는 빳빳한 건면을 사용하죠.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생면은 잘 안 쓰려고 해요. 제 경우는 생면을 좋아하고 워낙 오물조물 만드는 걸 즐기다 보니 선호하게 됐죠. 실제로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서는 생면 파스타를 많이 먹습니다.” 꼬들꼬들함 없이 칼국수처럼 구수하면서도 부드러워 ‘파우자 표’ 생면 파스타는 많은 고객을 고정 팬으로 확보하고 있다. 강성영 스타일로 음식에 재해석이 더해지기도 한다. 크림소스 파스타가 그것. “원래 이탈리아에는 크림소스 파스타가 없다”는 그의 말은 의외였다. 정말 현지 음식이 아니라고? 중국에 우리나라에서 먹는 자장면이 없는 것과 비슷한 건가. 미국을 거쳐 국내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탄생한 걸로 유추된다고 설명했다. 정통 이탈리아 음식을 표방하지만 과하다 싶을 정도의 느끼함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는 이 음식에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불어넣음으로써 좀 더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맛으로 바꿨다. 얼마 전에는 이탈리아식 오징어순대 같은 이색 메뉴를 개발해 새로 선보이기도 했다. 한 고객은 “쉽다, 간소하다, 소박하다, 솔직하다, 평범한 듯 특별한 이곳의 매력 때문에 어느덧 또 다시 찾아와 잠시 쉬고 있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며 감상을 풀어냈다. 파우자의 가치와 강 셰프의 요리에 대한 진정성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너무 고맙죠” 아들과 아내의 열렬한 지지
강 셰프가 요리를 만들면 서빙 및 고객 응대는 스물다섯 살 난 아들 몫이다. 홀 담당 매니저인 셈이다. 휴학을 하고 적극적으로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다. 사실 그가 이렇게 ‘즐거운 인생’을 찾아 나설 수 있었던 건 아들과 아내의 열렬한 지지 덕분이다. 대학교 같은 과 동기로 결혼한 아내는 언제나 남편의 든든한 지원군이 돼 세월을 함께 보내왔다. 늦은 나이에 생뚱맞게 요리사를 하겠다고 나선, 어쩌면 무모해 보이는 이번 도전도 이해하고 응원해 줬다. 그는 잘 나가던 광고기획자였다. 홍대 미대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후 1985년 대우그룹 기획실 광고팀과 광고대행사 오리콤을 거쳐 2007년까지 친구와 함께 광고디자인 제작회사를 운영했다. 대우차 마티즈와 레간자 광고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창의력과 기획력이 뛰어나 내놓는 아이디어마다 사람들을 주목시켰고 능력을 인정받았다. 재미있어 신명나게 일했다. “내가 제일 잘 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저보다 훨씬 훌륭하고 뛰어난 기획을 내는 젊은 친구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뒤처진다는 생각이 드니까 광고일이 힘들어지기 시작했죠.” 1999년 광고 촬영차 스페인·이탈리아 해외 출장을 갔다가 이탈리아 요리에 매료됐다. “맛도 좋지만 올리브오일, 치즈를 많이 사용하는 건강식이에요. 또 신선한 재료를 최소 가공해 음식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이탈리아 요리의 장점입니다.” 요리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싹 텄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데도 호기심이 컸기에 이탈리아 요리를 배워보고 싶은 학구열이 불타올랐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 길로 이탈리아 요리학원에 등록했다. 취미반에서 마스터 코스까지 모두 마치고 이탈리안 레스토랑 곳곳을 찾아다니며 음식을 먹어봤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이것보다는 잘 만들 수 있는데….” 성에 차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20년 간 거침없이 날아오르던 광고장이는 돌연 요리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운영하던 회사를 정리하고 2008년 이탈리아 요리학교 ICIF로 유학을 떠났다. 현지에서의 교육 과정이나 훈련도 혹독했지만 무엇보다 말이 통하지 않아 고생했다. 3개월간 이탈리아어를 배워서 간 게 전부였으니까. “주방 도구나 조리 표현 위주로 하루에 몇 십 개씩 단어를 달달 외웠죠. 그나마 주방이란 곳이 말보다는 요리를 더 많이하는 장소라 다행인 점도 있었어요. 셰프가 프라이팬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화를 낼 때도 있었는데 그 욕을 다 알아듣지 못하는 게 천만다행이다 싶었죠. 하하하.” 그는 귀국하자마자 바로 음식점을 차리지 않았다. 국내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경험을 쌓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서다. 그러나 50대인 그가 일자리를 찾긴 쉽지 않았다. 겨우 자리가 생겨 들어간 서울의 한 레스토랑. 위계질서가 엄격하다는 주방이란 공간에서 그는 젊은 요리사들과 부대끼며 온갖 허드렛일까지 맡아 했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야말로 온몸으로 부딪치는 밑바닥 체험이었다. 힘든 시기를 이겨낸 그는 2억 원의 알토란 같은 자금으로 2009년 11월 드디어 꾸밈없고 소탈한 그를 닮은, 이탈리아 음식점을 열었다. 나이 더 들어도 오래 하고 싶다오픈 초기, 인테리어 3000~4000만 원에 주방 꾸미는 데 2000~3000만 원 정도가 들었다. 예상보다 비용이 많이 들었단다. 홍대 거리에 터를 닦은 지 3년째.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겠다 싶었다. “음식점 장사는 처음이라 그동안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죠. 아직도 과정 에 있다고 봐요. 생활비 쓰는 데는 지장이 없을 만큼 법니다.” “대기업 시절 받던 연봉이 더 많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인생2막으로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남겼다. “사실 독립해 제 회사를 운영했을 때가 벌이는 더 좋았죠. 광고 한 건에 보통 4000~5000만 원이 통장으로 들어왔으니까요. 골프, 식사 등 광고주 접대에 100만 원씩 쓰고 카드비는 월 700만 원씩 나왔어요. 그때와 현재를 비교한다면 엄청난 차이죠. 하지만 예전 수입과 씀씀이에 연연하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어요.”얼마를 버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느냐를 고민하라는 얘기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수입은 생활비 정도면 된다는 것. 강 셰프에게 요리란 어떤 존재인지 궁금했다. “저는 광고 일을 하면서 신바람과 감흥을 느꼈습니다. 다시 한 번 그 신바람과 감흥의 맛을 일깨워준 게 바로 요리예요. 그래서 요리사로서의 직업이 힘들지도 않죠.” 강 셰프의 다음 꿈은 뭘까. “강남 청담동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많기로 유명하죠. 뉴욕 브런치 스타일이 유행하면 비슷한 식당들이 우후죽순 생겨납니다. 그런데 2~3년 후에 없어지는 가게들이 상당수예요. 트렌드를 좇으려고만 하기 때문이죠. 오래오래 할 수 있는 레스토랑을 하고 싶은 게 제 바람입니다.”식당이 완전히 자리매김하면 요리사를 두고 자신은 시골에서 이탈리안 식자재를 기르고 만들어보면 좋겠단다. “음식에 있어 재료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까 말씀드려서 아시죠? 이탈리아에서는 요리사가 돼지나 닭을 잡을 줄 알고 치즈도 만든답니다. 그리고 자부심을 가져요.” ‘음식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마법’ 바로 50의 나이에 강 셰프가 알게 된 ‘하늘의 뜻’이었다. 주방에서 펼쳐지는 요리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MBC TV드라마 ‘파스타’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맛있다’는 말보다 그저 말없이 빈 접시가 돌아오는 게 요리사에게 최고의 찬사다.” 그의 요리 접시가 그랬다.이코노믹 리뷰 전희진 기자 hsmile@<ⓒ 이코노믹 리뷰(er.asiae.co.kr) - 리더를 위한 고품격 시사경제주간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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