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주DNA]'우유사업, 농민엔 이익·국민엔 건강'…公益 실천한 '큰어른'

재계 100년-미래경영 3.0 창업주DNA서 찾는다<16> 매일유업 김복용 창업주 50세 넘어 '신선한 도전' 1971년 창업장사가 아닌 사업 "돈보다 사람 우선"12년째 특수분유 생산 '아름다운 실천'

김복용 회장(앞줄 가운데)과 문방흠 농어촌 개발공사 총재(왼쪽)가 1971년 한국낙농가공주식회사에 대한 합작투자계약을 맺고 있다.

[아시아경제 최대열 기자]자신의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2005년 12월, 김복용 매일유업 창업주(1920년생)는 편치 않은 몸을 이끌고 전북 고창을 찾았다. 이 지역은 김 회장에게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해방 전후 월남한 김 회장은 1970년대 고창에서 멀지 않은 광주에 처음 공장을 세웠고, 말년에는 이 곳에 자신의 평생 숙원사업이던 유기농 사업을 위해 상하면을 점찍은 터였다.그는 이곳에 유기농 목장을 운영하기 위해 수년전부터 이 지역 낙농가들을 설득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그곳을 다녀간 후 며칠 만에 김 회장은 숨을 거뒀다.2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이곳 지역명을 그대로 새긴 유기농우유 '상하'가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다. 상하는 '하늘'(上)과 '땅(下)'이 맞닿아 있다는 의미에서 유래된 지역명으로 김 회장의 유지가 깃든 이름이다.◆쉰 넘어 새로운 도전="우유를 생산해서 농촌을 잘 살게 하고 유제품을 생산해 국민 식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다시 그 돈이 유대(乳代)로 농촌에 되돌아가는 순환과정이 더 없이 이상적인 사업이란 느낌이 들었다. 또 매년 보릿고개 때마다 온 국민이 굶주림으로 고통받던 그 시절, 낙농업은 농민들에게 소득을 안겨 주고 전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공익사업이었다."1971년, 진암(晋巖) 김복용 매일유업 초대 회장은 정부가 운영하던 투자기업 한국낙농가공 주식회사를 인수했다. 당시 50세가 넘은 김 회장이 이전까지 전혀 손댄 적이 없는 농축산 분야였다. 세계은행과 우리 정부와의 협정으로 김 회장이 인수하기 2년 전 설립된 이 정부투자기업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직전까지 제분회사 대표를 지냈던 김 회장과 자금난에 허덕이던 한국낙농가공을 민간에 맡겨 제대로 운영해 보고자 했던 정부측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국내 굴지의 유가공업체로 인정받는 매일유업의 새로운 태동이었던 셈이다.

김복용 회장(왼쪽 세번째)을 비롯해 최각규 당시 농림부장관(왼쪽 첫번째) 등이 종합낙농개발사업의 산실인 매일유업 평택 시범목장을 방문해 시설을 돌아보고 있다.

당시 정부측 대표로 김 회장 설득에 나섰던 이득룡 농림부 차관은 "한국낙농을 인수하는 일은 성공보다는 실패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탓에 투자하겠다고 나서는 민간인이 아무도 없었다"면서 "결과적으로 김 회장이 인수했고, 이는 우리 나라 낙농업의 발전을 위해 크게 다행이었다"고 소회를 털어놨다.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겠다고, 돈 좀 있다는 이유로 김 회장이 아닌 다른 누군가 한국낙농을 인수했다면 오늘날처럼 국내 유가공사업이 발전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공익을 우선시하는 김 회장의 신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 회장을 비롯해 당시 생겨났던 다양한 유가공업체들의 노력, 정부의 지원정책이 맞물리면서 60년대 말까지 1㎏에도 미치지 못했던 국내 1인당 연간 우유소비량은 80년대 10㎏, 2000년대 넘어서는 60㎏ 이상으로 늘어났다.◆"공익(公益)위해 '장사'아닌 '사업'한다"=김 회장에게는 "사업은 많은 사람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협조해야 한다"는 경영철학이 있었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위해 건강식을 제공할 수 있는 유가공 사업이 적임이라고 판단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그는 지난 2004년 발간된 사사(社史)에서 "낙농업은 처음부터 이윤추구와는 거리가 먼 사업이었다"면서 "사업이란 이윤창출과 함께 온 국민, 나아가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공익적인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낙농업에 발을 들였다"고 창업 당시를 회상했다.

김복용 매일유업 창업주

올해로 12년째 계속 생산하고 있는 특수분유도 김 회장의 이런 생각에서 나왔다.지난 1999년 처음 내놓은 8종의 특수분유는 이익은커녕 손해를 내고 있지만 올해는 물론 내년에도 계속 생산된다. 해마다 2만 캔 이상의 분유를 만들지만 실제로 팔리는 것은 2500여개 남짓.나머지는 폐기처분하는데다 각종 연구개발비 등을 더해 지금껏 손실액수만 수억원에 달할 정도다. 해마다 특수분유를 만드는 시기에는 다른 공정을 중단하고 이 제품을 만드는 데 집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손실에도 불구, 매일유업은 사훈인 '봉사'와 '신뢰'를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선친의 뜻을 이어받은 김정완 매일유업 현 회장은 "힘들고 어려운 아이들의 건강이 우선"이라며 "힘이 닿는 한 계속 만들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장사와 사업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장사는 이기적이지만 사업은 공익적, 이타적이다. 사업가는 국민 복지와 국가발전에 기여한다는 사명감과 이상이 있는 까닭에 이 꿈의 실현을 위해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 신명을 다 바친다."최대열 기자 dychoi@<ⓒ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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