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피플&뉴앵글] 멜버른 '미사 거리'엔 '미사'가 없다?

난 가난하지만 캐논(Canon) 카메라 하나만 있으면 무서울 게 없는 유학생이다. 3년 전 손을 벌벌 떨며 거금에 구입했던 캐논 카메라는 이제 내 둘도 없는 든든한 친구이자, 파트너다. 2학기 들어선 이놈(카메라)이 드디어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생겼다. 새로 듣게 된 ‘호주의 이미지(Images of Australia)’ 라는 수업에서 중요한 수업과제로 멜버른 시내에서 관광객들이 즐길만한 여행루트를 조사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멜버른에 8년간 살면서 멜버른의 스트릿 아트를 꽤나 즐겼던 나는 이번 과제의 주제를 '그래피티 (Graffiti, 길거리 벽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자신만의 스타일로 낙서를 하는 것을 일컫는 말. 멜버른에선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로 잡았다. 그리곤 오랫만에 스트릿 아트 골목길 구석구석을 누볐다.
한 30~ 40분 쯤 돌아다녔을까. 한국 관광객들이 무리지어 있는 곳이 보였다. 바로 2004년 KBS에서 인기리에 방영됐던 '미안하다 사랑한다(이하 미사)'를 촬영했던 ‘미사 거리’다. '미사'를 보면서 무혁이(소지섭 분)에 열광했던 필자로썬 감회가 새로워지는 순간이었다. 2004년 히트한 '미사'는 소지섭과 임수정, 정경호 등 소위 훈남·훈녀 스타들이 지독하게 슬픈 사랑을 그려나가는 드라마다. 그중 소지섭과 임수정이 마주치는 골목길이 바로 이 스트릿 아트였다. 이 드라마는 호주에 생소했던 한국 사람들에게 호주, 특히 멜버른을 각인시킨 계기가 됐다. 드라마가 끝난 후 이곳은 한국 사람들의 호주관광 필수코스로까지 여겨지고 있다. '미사 거리'에 도착하자, 'HOSIER Lane'이라는 표지판이 나를 반겼다. 점심시간이 약간 지난 어중간한 시간이었는데도 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들부터 한국인 관광객들까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의식하지 않은 채 준비물을 하나씩 꺼냈다. 과제를 위해 들고온 '클립보드'와 사진을 찍기 위해 챙겨온 두툼한 카메라까지…. 영락없는 '나 관광객이요' 하는 차림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내 눈앞에선 무혁이와 은채(임수정 분)가 만나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으니까….한국 사람들에게 '스트릿 아트'는 관광명소가 됐지만, 호주 사람들에게도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인근에 있는 '페더레이션 광장(Federation Square)'와 '빅토리아국립미술관(NGV, National Gallery of Victoria)'로 가다 잠깐 들리는 '거쳐 가는 길거리'일 뿐이다. 관리를 하지 않아 거리 곳곳엔 쓰레기 냄새가 진동한다. 쥐도 나올 것 같다. 오랫만에 찾은 스트릿 아트엔 무혁이와 은채가 만났던 드라마 속 그래피티를 찾을 수 없었다. 5년이란 시간 동안 새로운 그래피티가 옛것을 뒤덮은 것이다. 진동하는 쓰레기 냄새와 사라진 드라마 속 그래피티는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아른거린 무혁이와 은채를 생각하면 얼굴에 지긋이 미소가 띄워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아직도 한국 관광객들이 그렇게나 많이 이곳을 찾는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글= 송경원 정리= 윤종성 기자 jsyoon@asiae.co.kr◇송경원 씨는 현재 멜번 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2학년에 재학 중이다. 영화, 사진 등에 관심이 많으며, 졸업 후에는 방송사나 언론사에 취업해 '엣지있는' 여기자가 되고 싶어 하는 당찬 여성이다.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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