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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공직자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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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학자인 이단상은 효종 제위 때인 1658년 임금의 특명으로 전라도 암행어사가 됐다. 효종 9년 지독한 흉년이 벌써 몇 해째 계속됐다. 거지가 된 굶주린 백성들이 호사스럽게 살고 있는 양반집 문 앞에서 진을 쳤다. 이를 보다 못한 이단상은 "창고의 곡식들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라. 지금부터 내 명을 거역하는 자는 용서치 않으리라"고 했다. 국법을 어긴 것이라고 만류하는 고을 수령에게 이단상은 이렇게 말했다. "이토록 굶주린 백성들 앞에서 국법을 운운할 수 있겠소. 이후 어떠한 일이 생기든 내가 모두 책임질 터이니 현감은 걱정 놓으시오. " 이단상은 또 다른 고을, 전라남도 곳곳을 돌며 양반집 곳간을 열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도록 했다.


이듬해 효종에게 불려간 이단상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보고 듣고 행한 것을 아뢰었다. 효종도 같이 눈물을 흘리며 국법을 어긴 죄를 묻지 않고 "잘했노라"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이단상의 일화다.


공직자나 공무원을 공복(公僕)으로 부르거나 공직자가 자신을 공복이라고 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공복은 국민에 대한 봉사자, 국민의 심부름꾼이라는 의미다. 부정적 의미의 공복(公伏)도 있다. 권력 앞에, 주어진 업무 앞에서 배를 납작 엎드려(伏) 복지부동으로 폄훼하기도 한다.


누가 공직자 또는 공복이 될 것인가, 아니면 복지부동의 공복이 될 것인가는 임기 말로 갈수록 또렷하게 갈린다. 문재인 정부의 집권 후반기가 어느덧 임기 말에 다가서고 있다.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 결과와 대통령의 지지율 추이, 집권당에서 나오는 위기의 목소리 등을 종합해보면 레임덕이 조심스레 점쳐지고 관료사회에서도 레임덕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레임덕의 대표적 징후는 △영(令)이 서지 않는 것이고 △관료사회가 다음 정권에서 책임소지가 발생할 수 있는 정책ㆍ대책ㆍ시책 등에 앞장서지 않거나 이에 반기를 드는 것이고 △핵심업무 기피현상과 줄서기 등이다.


피상적으로 봐도 경제는 양극화의 길을 간다. 집값이 뛰고 주가가 오르고 코인이 폭등했다. 돈을 번 사람들이 넘쳐나고 어렵다던 기업들의 실적도 좋다. 경제는 코로나19 이전 수준의 반등 기미도 보인다. 하지만 코로나19의 후유증은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영세사업자는 물론이고 코로나19에 직격탄을 맞은 업종에서 곪을대로 곪은 상태다. 국회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정부가, 공직자가, 그중에서 고위직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


[시시비비]공직자의 자세 이경호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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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견수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는 ‘고위공직자의 책무성; 정치적 중립에서 정치적 신중함으로’라는 논문에서 고위공직자들에게는 정치적 중립이 갖는 당위적이고 규범적 속성이 오히려 그들을 옥죄는 덫으로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윤 교수는 "고위공직자의 책무성은 단순히 기관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지켜야 한다거나 민의를 반영한 정부의 공약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것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이들이 보여주는 책무성의 기반은 서로 충돌하기도 하는 다중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긴장 속에서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백성의 구휼을 위해 "곳간을 열라"고 한 이단상은 정치인이자 정무직 공무원이다. 자신의 행위가 정치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국정의 사무를 책임진 고위직으로서 결단을 한 것이다. K방역 같은 많은 K시리즈가 있지만 이제는 ‘K공직자’도 나올 때가 아닌가 싶다.




이경호 사회부장 gungh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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