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국사책에서 고려의 마지막 개혁군주라 알려진 공민왕과 항상 같이 거론되는 개혁조직이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이란 조직이다. 글자 뜻 그대로 토지와 그 주인을 제대로 분별해 바로잡기 위해 만들어졌다. 당시 권문세족들이 조세 회피 목적으로 차명 보유하고 있던 부동산의 원주인을 밝혀 세금을 추징하고, 투기 목적으로 불법 보유한 토지들을 몰수하는 조직이었다.
흔히 공민왕이 1365년 승려였던 신돈을 앞세워 세운 것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 이 조직의 역사는 훨씬 길다. 처음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된 해는 신돈이 등장하기 약 100년 전인 1269년이었다. 그때부터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하는 1388년까지 권력 교체기마다 임시기구로 세워졌다 다시 해산했다가를 일곱 번이나 반복했다. 이로 인해 고려 말기의 역사는 이 전민변정도감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정도다.
당시 고려왕조의 부동산 문제는 지금보다 훨씬 복잡했다. 1259년, 몽골 원나라와 40년간 전쟁이 끝난 뒤 고려 전국의 토지는 잿더미로 변했지만 곧 조정의 복구정책이 이어지면서 100여년간 부동산 투기가 판을 쳤다. 원나라 황제의 사위가 된 고려왕들도 1년에 2~3개월만 고려에 머물고, 나머지 기간은 원나라의 수도 연경에 머물면서 황제와 귀족들로부터 고려 복구를 위한 투자를 유치하고 로비하는 데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낼 정도였다.
이렇게 해서 복구지역이 결정되면 원나라 귀족들과 연줄이 닿아 있던 권문세족들이 가장 먼저 개발정보를 얻었다. 이후 그들은 복구지역으로 지정될 토지를 미리 싼값에 매입한 뒤 땅값이 치솟으면 이를 매각해 엄청난 시세차익을 누렸다. 이 차익 중 일부를 다시 원나라 귀족들에게 뇌물로 바치곤 했다. 이처럼 국제적으로 행해진 부동산 투기에 해당 토지의 원래 주인들, 그리고 원주인과의 임대차 계약으로 세 들어 살던 소작농들까지 모두 극심한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세운 것이 전민변정도감이었지만, 제대로 기능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20여년간 7차에 걸친 변정조사는 도감을 이끄는 판관들이 주도했지만, 조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판관들이 바로 변정조사의 대상으로 바뀌곤 했다. 신돈도 자신이 판관을 맡아 개혁의 칼을 휘두른 지 불과 6년 만에 고려 최대 투기꾼으로 불리며 조사 대상으로 전락해 결국 사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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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여년 전 중세시대 역사에서나 볼 법한 공직자들의 연줄로 얽히고설킨 대규모 부동산 비리가 21세기 한국에서도 논란이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려왕조가 1391년 마지막 변정조사를 끝마친 이듬해, 민심의 이반을 견디지 못하고 멸망했던 역사를 공직자들이 유념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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