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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현대판 유목민 새로운 삶에 눈을 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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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이 자오 감독·프랜시스 맥도먼드 주연 '노매드랜드'

[이종길의 영화읽기]현대판 유목민 새로운 삶에 눈을 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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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물질적으로 풍요하지만 정신적으로 빈곤하다. 산업화로 물질적 가치가 우선시돼서다. 정주(定住), 다시 말해 머물러 사는 삶은 마땅한 해법이 아니다. 바쁜 일상으로 공간이나 이웃과 유대 관계가 약하다. 핵심 가치인 연속성과 지속성도 불안정하다.


1900년대 초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발전한 미국 디트로이트가 대표적인 예다.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이 약화하고 부유층이 외곽으로 이동하면서 범죄가 들끓는 폐허로 변했다. 방만한 재정 집행, 불안한 치안, 노조의 무리수 등이 더해져 2013년 파산을 신청했다.


영화 ‘노매드랜드’의 배경인 미국 네바다주 엠파이어도 다르지 않다. 도시를 지탱했던 석고보드 공장이 문 닫으면서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일자리를 잃은 펀(프랜시스 맥도먼드)은 작고 낡은 밴으로 유랑한다. 생계비는 ‘아마존 캠퍼포스’에 자원해 해결한다. 아마존이 연말 성수기에 유목민에게 제공하는 일자리 프로그램이다. 노동자·기업의 상생이라는 취지와 달리 60세 이상 고령자에게 혹독한 노동을 강요한다.


[이종길의 영화읽기]현대판 유목민 새로운 삶에 눈을 뜨다


펀은 역설적이게도 한동안 물류창고 일을 이어가지 못하면서 새로운 삶에 눈을 뜬다. 계곡에서 부초처럼 떠다니며 사색에 잠기고, 붉게 떨어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여유도 즐긴다. 도시에선 해보지 못했던 진귀한 경험들이다.


펀은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기도 한다. 내밀한 이야기로 정서적 유대감을 쌓는 한편 남편 잃은 슬픔을 치유한다. 그는 배회하는 젊은이 데릭(데릭 엔드레스)에게 조언해주기에 이른다.


"외롭지 않아? 여자친구는 있어?"


"솔직히 한 명 있어요. 북쪽에 살고 있죠. 작은 농장이요. 그곳 생활에 만족하고 있어요. 편지를 써요. 그런데 쓸만한 말이 별로 없죠. 그녀가 좋아할 만한 거요."


"내가 결혼 서약서에 썼던 시는 어때? 너보다 나이가 많지 않았을 때야. (…) 그대를 여름날에 비유해도 될까요? 당신은 여름보다 더 사랑스럽고 온화합니다. (…)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시들게 마련이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초라해지지만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바래지 않고 그 아름다움은 영원할 것입니다. 죽음조차 가두지 못할 것입니다. 그대가 이 불멸의 서약 안에서 살고 우리가 숨 쉬고 볼 수 있는 한 이 서약은 우리에게 생명을 줄 것입니다."


[이종길의 영화읽기]현대판 유목민 새로운 삶에 눈을 뜨다


펀은 긴 유랑에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많은 추억이 담긴 집으로 돌아가지만, 다시 낡은 밴에 올라 시동을 건다. 어디서도 과거를 기억하며 삶을 일굴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스스로 연속성과 지속성을 유지하는 힘을 갖게 된 것이다.


오래 전 유목민족들의 삶도 그랬다. 유목민은 사전적 의미로는 정주와 거리가 멀다. 하지만 삶의 원칙적 측면에서 정착하는 장소와 꾸준히 유기적 관계를 맺는다. 바람이 고향인 양 이동하며 일상을 지속한다는 믿음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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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이 자오 감독은 다큐멘터리적 시선을 더해 그 가치의 회복을 가리킨다. 주인공의 이름도 펀(Fern)이라고 지었다. 꽃과 종자 없이 포자로 번식하는 양치식물이라는 뜻이다. 양치식물은 4억 년 전부터 존재했다. 펀은 포자처럼 바람을 타고 끊임없이 이동한다. 이별 없는 새로운 공동체의 삶으로….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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