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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수의 책으로 읽는 세계]쿠팡이 노동자에 끼얹은 모욕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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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제 노동 인식과 과로사 논란
노동을 상품으로 본 볼질적 오류
일은 생계수단이자 인간존엄의 핵심

한 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모두 올해 할 일을 차분히 떠올린다. 해내야 할 일, 치러야 할 일, 하고 싶은 일, 이루고 싶은 일 등을 나누고, 거기에 들여야 할 시간과 노력을 각각 가늠한다. 주어진 시간을 하고 싶은 일, 이루고 싶은 일에 더 많이 내어줄수록 우리 마음은 희망으로 부푼다. 꼭 치러야 할 일,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이 넘치면, 인간은 현재에 붙잡혀서 미래를 잃는다. 막 새해가 시작된 지금은 아직 넉넉히 시간이 남아 있기에 모두 현재보다 미래를 꿈꿀 시간이다.

[장은수의 책으로 읽는 세계]쿠팡이 노동자에 끼얹은 모욕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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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좋은 때에 나는 마음이 꽤 불편했다. 김범석 쿠팡 의장이 했다는 말 탓이었다. "시간제 노동자는 성과로 돈을 받는 게 아닌데 그가 왜 열심히 일하겠나, 말이 안 된다." 한 해 계획을 짜면서 나는 이 말에 담긴 일그러진 노동 인식, 타인의 존엄을 무시하는 비윤리성이 줄곧 마음에 걸렸다. 거기엔 인간 노동의 본성에 관한 오랜 질문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왜 죽을 만큼 열심히 일하는가? 도대체 인간에게 일이란 무엇인가?


김 의장이 그 말을 한 건 2020년 한국 쿠팡 대표로 있을 때였다. 그해 10월 쿠팡에서 일하던 장덕준 씨가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쿠팡 물류센터에서 1년 4개월간 새벽 근무를 해오다가 퇴근한 후였다. 장시간 이어진 무리한 노동에 따른 과로 탓이었다. 사건이 일어나자, 김 의장은 사내 관계자에게 메신저로 장씨가 "열심히 일했다는 기록이 남지 않게 확실히 하라"고 지시 내렸다. '물 마시기, 화장실, 대기 중, 빈 카트 옮기기' 같은 단어도 언급했다고 한다. 노동시간에서 제외하란 뜻으로 보인다. 쿠팡 측은 부인했으나, 4년 후 유족의 소송 끝에 장씨는 과로사 인정을 받았다.


'불평등은 어떻게 몸을 갉아먹는가'(돌베개)에서 알린 제로니머스 미시간대 교수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건강 문제를 웨더링(weathering)이란 말로 정리했다. 웨더링은 '풍화, 침식'을 뜻하는 말로, 본래 기상학에서 바위가 비바람에 닳아 없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계급, 성별, 인종 등에 따른 차별이나 편견은 사회적 약자에게 반복적인 스트레스를 가져온다. 바람에 자주 노출되는 바위가 빨리 마모되듯, 웨더링은 잦은 스트레스가 그의 신체에 쌓이면서 건강을 상하게 한다는 뜻이다.


가난한데 성실하면 더 빨리 병들고 더 먼저 죽는다. 가족을 부양하고 집안을 살리려면, 질 나쁜 노동 환경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열정을 다해서 일하는 까닭이다. 인간 한계를 시험하는 가혹한 노동은 노화를 가속하고, 당뇨와 고혈압 등 만성질환을 일으키며 장애나 돌연사를 유발한다. 가난해서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는데, 열심히 일할수록 빨리 죽는 아이러니가 노동자들을 진퇴양난으로 몰아간다. 산업화 시대에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말을 자주 듣곤 했다. '죽도록 일해 이제 살 만하니까 몸이 아프다.' 웨더링 때문이다.


제로니머스에 따르면, 어떤 조직이나 사회에서 건강을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 책임으로 돌리는 문화가 팽배할수록 성실한 사람이 더 먼저 병들고 더 빨리 죽는다. 현장에서 사람이 자꾸 죽어 나가면, 경영자는 자기 회사의 노동 구조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쿠팡은 안 그랬다. 김 의장의 말처럼, 시간제 노동자는 죽을 만큼 열심히 일할 이유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말이 물류센터 노동자는 설렁설렁 일해도 된다는 뜻일 리 없다. 오히려 그런 인식에 따라 쿠팡은 노동자가 죽도록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구축한 듯하다. 노동 당국의 '장덕준 씨 과로사 인정'은 그 선연한 증거다.


한 기자의 탐사보도를 보면, 쿠팡 물류센터에서 노동은 작업 현장을 빈틈없이 둘러싼 CCTV, 끝없이 물건을 쏟아내는 컨베이어벨트, 수시로 작업 속도를 올리라고 소리치는 관리자 등 지속적 압박을 받는다. 이런 환경에서 밤낮이 뒤바뀐 새벽 노동을 긴 시간 이어가다 보면, 웨더링 현상 탓에 몸이 삭아가다가 한순간 멈출 수밖에 없다. 물류센터 현실을 빤히 알 텐데도, 미안하다고 말하기는커녕 '열심히 일하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건 염치 없고 비인간적이다. 감정 없는 괴물, 오직 돈으로만 타인을 평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경제적 동물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일을 사고파는 상품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저급한 노동윤리다. '나에게 일이란 무엇인가'(이후)에서 존 버드 미네소타대 교수는 현대 노동윤리가 일을 상품으로만 보는 배금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면서 시작했다고 말한다. 인간이 열심히 일하는 건 돈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노동은 '존엄성과 자기 결정권이라는 확고한 권리를 가진 인간이 추구하는 활동'이다. 노동을 통해 인간은 자기 자유를 실현하는 길을 열어가고, 자립과 자립의 기회를 확장한다.


일은 한 공동체에 자신이 소속돼 있음을 보여주고, 그 안에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시민으로서 자신의 동등성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만족시키고,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도 성실히 일한다. 시간제 노동자가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다른 사람을 그 자체로 존귀하게 대하지 않고 돈 넣은 만큼만 결과를 토해내는 노동 자판기로 보는 것과 다름없다. 이런 몰인정한 태도에 대해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을 내려 비판했다. "정의는 노동자 인격의 존엄성을 존중하기를 요구한다. 인간이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근육과 힘이라는 가치 이상이 평가되지 않는다면 부끄럽고 비인간적이다."


웨더링, 즉 노동자가 가혹한 노동을 견디다 못해 병들어 죽어가는 현상은 저임금, 긴 노동시간, 위험한 조건에 인격적 무시, 구조적 차별 등이 겹칠 때 일어난다. 그러나 이런 나쁜 환경에서조차도 일은 그 자체로 즐겁고 보람차다. 조지프 콘래드는 말했다. "다른 이들이 그렇듯, 나는 일하는 게 싫다. 그러나 일에 내재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좋아한다." 좋은 사람들은 노동을 통해 자신의 성실한 인격을 확인하고, 주변 동료에게 훌륭한 사람임을 보여주며, 폭넓은 관계 속에서 자기 성장을 도모한다. 한마디로, 일은 인간 존엄의 핵심이다. 일을 돈으로만 바라보는 그 편협한 태도에서 우리가 크게 모욕감을 느낀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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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수 출판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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