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문화를 상징하는 워싱턴 D.C. 케네디 센터가 ‘트럼프-케네디 센터’(The Donald Trump and The John F. Kennedy Memorial Center for the Performing Arts)로 이름을 바꿨다. 무엇을 하든 상상 그 이상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명칭을 바꾸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사회를 전원 친트럼프 인사로 교체하고 송년 분위기로 떠들썩해야 할 트럼프-케네디센터가 때아닌 정적에 잠겼다. 지난 20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성탄 전야에 스윙 리듬을 선사한 재즈 뮤지션 척 레드(Chuck Redd)의 공연이 갑자기 취소됐기 때문이다. 음악이 사라진 무대에는 정치적 질문이 남았다. 척 레드는 공연장 명칭을 ‘트럼프-케네디 센터’로 바뀐 것에 항의하며 스스로 공연을 취소했다. 트럼프- 케네디 센터 이사회는 척 레드에게 100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미국 사회의 반응은 둘로 갈라졌다. 예술에 정치적 신념을 끌어들여 전통을 훼손했다는 비난과 음악가의 양심을 지킨 용기 있는 행동이라는 찬사가 엇갈렸지만 그의 결단은 재즈라는 음악의 본질을 21세기에 다시금 소환한 의미심장한 결단이다.
재즈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억압에 맞선 ‘저항의 계보학’을 읽을 수 있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1917~2012)은 “재즈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음악이며, 현대 사회의 순응주의를 거부하는 가장 강력한 음악”이라고 했다. 재즈를 사랑해 프랜시스 뉴턴이라는 필명으로 평론가로도 활동했던 홉스봄의 시각에서 볼 때, 재즈는 상류층의 여흥을 장식하는 세련된 라운지 음악이 아니다. 재즈는 록음악과 함께 인류 문화를 통틀어 비주류에서 태어나 메인스트림으로 진입한 유일한 사례다.
재즈는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끌려온 흑인 특유의 리듬감에 유럽의 고전음악이 결합한 특별한 형태의 예술이다. 억압받는 자의 소리이기에 한이 서려 있으며 저항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 1950년대 빌리 홀리데이가 인종 차별을 고발한 노래 ‘이상한 과일(Strange Fruit)’이나, 평생 민권 운동을 펼친 맥스 로치의 드럼 연주는 재즈가 시대의 양심이었음을 들려준다.
재즈의 가장 중요한 특징 ‘즉흥 연주(Improvisation)’ 역시 저항의 속성을 내포한다. 작곡가의 악보를 바탕으로 한 엄격한 규칙에서 벗어나 연주자 개인의 자유 의지를 극대화한다. 연주가 획일화되는 것에서 벗어나려는 본능적인 거부다. 권위주의와 억압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트럼프-케네디 센터’에서 척 레드가 연주를 거부한 것은 재즈가 가진 자유로운 즉흥성의 발현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음악이 권력의 장식품으로 전락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재즈의 자존심을 지켰다. 무대가 자신의 신념을 훼손하는 상징물로 훼손되자, 악기를 내려놓음으로써 ‘소리보다 강력한 침묵’이라는 연주를 마친 셈이다. 대중과의 약속을 어겼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겠지만, 음악가에게 영혼 없는 연주를 강요할 수 없다. 척 레드 앞에 닥친 100만 달러의 소송은 그가 지켜낸 예술적 가치의 무게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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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는 박제된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여전히 살아 숨 쉬며, 부당하다고 느끼는 현실 앞에서는 언제든 연주를 멈추고 저항할 준비가 되어있는 진행형의 음악이다. 이번 척 레드의 공연 취소는 ‘노 쇼(No Show)’가 아니라 ‘노 서렌더(No Surrender)’로 기록될 것이다. 홉스봄이 말했던 ‘불온한 열정’은 2025년 겨울, 차가운 워싱턴의 대기를 뚫고 진정한 예술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다. 공연장의 불은 꺼졌지만, 그가 남긴 메시지는 그 어떤 선율보다 강렬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임훈구 디지털콘텐츠매니징에디터 keygrip@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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