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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다시 만난 586세대, 고창에 '서점마을'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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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책 마을'…"소박하고 적정한 삶" 실험
80년대 운동권 세대 귀향, 정치 아닌 '생활' 선택
“은퇴 후 다른 삶”…지역문화 운동 새 모델 주목

책으로 다시 만난 586세대, 고창에 '서점마을' 짓다 전북 고창군 대산면 언덕 위에 들어선 서점마을에는 철학·그래픽노블·생태·여행·그림책 등 여섯 개의 작은 서점이 모여 책으로 다시 삶을 짓고, 공동체와 나눔을 중심에 두는 방식의 은퇴 후 삶을 살아가고 있다. 박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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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고창에는 특별한 두 개의 마을이 있다. 대산면의 '고창 서점마을'과 해리면의 '책마을해리'다. 이름처럼 책을 매개로 모인 이 두 마을은 한국 지역 문화운동의 새로운 모델로 주목을 받고 있다.


고창 서점마을은 여섯 개 독립서점이 모여 형성된 한국 최초의 '서점마을'이고, 책마을 해리는 폐교를 인수해 '책 만드는 마을'로 변신한 공간이다. 두 곳 모두 책을 매개로 한 공동체적 삶을 실험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크다.


◇ 한국 최초 서점 마을…'소박하고 적정한 삶' 실험

고창군 대산면 언덕 위에 들어선 서점 마을에는 철학·그래픽 노블·생태·여행·그림책 등 여섯 개의 작은 서점이 모였다. 촌장 이윤호(63) 씨는 1990년대 문화지 '예감', '리뷰'를 발간했던 문화평론가 출신이다. 서울에서 인문학 아카데미를 운영했지만, 젠트리피케이션에 밀려 터전을 잃으면서 '한국판 헤이온와이(Hay-on-Wye, 영국 서점 마을)를 만들어보자'는 발상을 품었다.


이 씨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도시의 쫓기는 삶에서 벗어나 소박하고 적정한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얼마를 벌고 소비하는 게 적정한지, 공동체 속에서 어떤 관계가 적정한지를 서점이라는 공간에서 실험해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 구상에 뜻을 같이한 건 인문학 강연에서 인연을 맺은 강준석·황경선 부부, 그리고 패션 기획자 출신 이준호씨였다. 이들은 '책으로 삶을 꾸리자'는 합의로 부지 4,000평을 마련해 2,000평에 집과 서점을 짓고, 나머지 2,000평은 공동 농사에 활용하고 있다. 각자 전문성과 취향을 살려 서점을 열되, '장사라기보다 생활로서의 서점을 지향한다'는 공통점이었다.


서점 마을 사람들은 원칙도 세웠다. ▲3년간은 서점을 팔지 않고 휴일 없이 문을 열 것 ▲모두가 동의하지 않으면 추진하지 않을 것 ▲서점은 숙박시설의 부속물이 되지 않을 것 등이다. 이들은 서점 공동 운영 외에도 중고서점 '리북', 지역 특산물 가공을 위한 마을기업까지 함께 세웠다.


◇ 폐교에서 책의 마을로, 책마을해리

대산면 서점 마을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해리면에는 이미 2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책마을해리가 있다. 이대건(55) 촌장은 지난 2006년 증조부가 세운 옛 간이학교가 폐교된 자리를 인수해 '책 만드는 마을'로 변모시켰다. 30년간 1,000권 넘는 책을 편집한 그는 책을 소비하는 공간이 아니라, 저자가 되는 마법의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책마을해리는 출판 캠프, 마을 학교, 책 영화제 등을 통해 5,000명이 넘는 '저자'를 배출했다. 어르신부터 청소년까지 책을 직접 쓰고 출간하면서, 이곳은 단순한 독서 공간을 넘어 출판 공동체로 자리 잡았다.

책으로 다시 만난 586세대, 고창에 '서점마을' 짓다 1980년대 조선대학교 중국어과에서 학생 운동을 했던 (사진 왼쪽부터) 강준석·김철홍·김성열씨. 세 사람은 소방기사, 육류영업, 식자재 유통으로 직장 생활과 사회활동을 해왔으며,은퇴 이후엔 책방과 마을공동체를 통해 삶의 방식을 바꾸는 도전을 하고 있다. 박창원 기자

◇ 권력의 길이 아닌 '생활의 길'

고창 서점 마을의 구성원 여섯 명 중 절반은 1980년대 조선대학교 중국어과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PD 계열 출신이다. 강준석·김철홍·김성열 세 사람이다.


특히 강준석씨는 당시 조선대학교 총학생회장 후보로 나서서 깊게 운동에 관여했던 인물이다. 1980년대 후반,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로 갈라졌던 학생운동 진영에서 이들은 PD 계열에 속했다. NL이 민족주의와 정치적 권력 중심으로 이동했다면, PD는 노동·현장·문화 속에서 대안을 찾으려 했다.


강 씨는 "우리 세대에게 운동은 끝났지만, 질문은 남아 있다. 정치로 가서 기득권과 타협하는 길도 있었지만, 저는 그 길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국 남는 건 생활이고, 공동체 속에서 사람과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이 선택의 차이는 이후 삶의 궤적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NL 출신 상당수가 정당·정치권에 진출해 제도권 권력을 붙잡았던 반면, PD 출신 상당수는 지역 사회나 문화·교육 영역으로 흩어졌다. 고창 서점마을을 만든 이들은 바로 그 흐름 속에 있다.


강 씨와 동료들은 소방기사, 식자재 유통, 육가공 영업직으로 직장생활과 사회활동을 거쳐 은퇴를 앞두고 다시 모였다. 그들이 선택한 건 '책으로 사는 법'이었다. 정치권력을 통해 사회구조를 바꾸는 게 아니라, 책방과 마을공동체를 통해 삶의 방식 자체를 바꿔보자는 것이다. 이는 운동권 세대가 은퇴 후에도 '다른 삶의 가능성'을 실험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들은 자신을 '이제 와서 영웅이 되려는 세대가 아니라, 가난할 마음으로 사는 세대'라 규정한다. 권력의 길이 아닌 '생활의 길'을 택한 이 귀향은 1980년대 운동권 세대가 사회에 던지는 새로운 메시지다.

책으로 다시 만난 586세대, 고창에 '서점마을' 짓다 전북 고창군 대산면 서점마을 전경. 박창원 기자

◇ 세대와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고창 서점마을의 실험은 단순한 지역 문화공간 조성이 아니다. 이는 민주화운동 세대가 은퇴 이후 어떤 가치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다. 자본에 밀려난 공간에서 책으로 다시 삶을 짓고, 공동체와 나눔을 중심에 두는 방식은 한국 사회에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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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가 아닌, 책을 온전히 즐기는 곳'이라는 서점마을 사람들의 선언처럼, 이들의 실험은 화려하지 않지만, 꾸준히 그리고 단단하게 한국 사회의 문화적 지형을 바꿔가고 있는 중이다.




호남취재본부 박창원 기자 capta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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