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에게는 이탈리아 토리노에 거주하는 한 살 터울 동생이 있다. 동생은 지난 24일 제21대 대선 재외국민 사전투표를 하기 위해 밀라노까지 갔다. 기차로 왕복 2시간 거리에 푯값 28유로(약 4만3682원)가 들지만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시간과 경비를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다. 동생은 기차를 타기 전 후보의 공약이 궁금해 이메일로 날아온 선거 공보물을 봤지만 설명은 두루뭉술하고 왠지 비현실적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기자인 형에게 후보들의 구체적인 공약이 뭔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물었다. 하지만 답변할 수 없었다.
![[기자수첩] 공약도 모른 채… '산넘고 물건너' 재외국민 투표](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25051909032562502_1747613005.jpg)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21대 대선이 코앞에 다가와서야 공약집을 내놓는다. 역대 가장 늦은 대선 공약집이다. 국민의힘은 대선 8일 전인 지난 26일 공약집을 당 홈페이지에 게재했고 민주당은 28일 발표했다. 민주당의 공약집 공개 시점은 사전투표일 하루 전이다. 공약집 분량도 방대하다. 국민의힘 공약집은 총 430페이지, 민주당은 375페이지다. 이 엄청난 양의 내용을 꼼꼼히 읽어 보고 다음 날 투표를 할 유권자가 얼마나 될까.
양당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고 해명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으로 치러지는 사상 첫 6월 대선이기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고 말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으로 치러진 2017년 대선도 지각 공약을 발표했지만 문재인 후보는 11일 전, 홍준표 후보는 22일 전 공약집을 공식 발표했다.
공약집은 후보를 배출한 정당의 비전을 살펴보는 가장 중요한 자료다. 물론 양당 후보는 유세 현장, TV 토론을 통해 자신의 공약을 설명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공약집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 대선 후보들이 고의든 아니든 검증을 회피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유권자는 양당의 공약을 오랜 시간 두고 검증할 기회를 박탈당한 셈이다.
공약 검증이 사라진 대신 서로를 향한 비방이 난무했다. TV 토론에서 주로 다뤄진 후보들의 가족사, 토론 태도 등은 정책 대결과 거리가 멀다. 네거티브에서 멈추지 않고 각 후보는 서로를 향해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고발하고 있다. 보수진영 후보의 단일화 이슈는 대선 레이스가 막을 올릴 때부터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각자의 정책을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하는 게 아닌, 두 후보의 지지율 합산과 대선 승리 가능성만 언급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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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투표를 위해 2시간 동안 기차를 탔지만 재외국민 투표 1호 뉴질랜드에 사는 18세 대학생은 7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표를 얻기 위해 무엇이든 한다고 했던 정치인들은 지각 공약으로 이들에 대한 예의를 저버렸다. 대선 투표일이 일주일밖에 안 남았지만 지금이라도 공약집을 기반으로 정책 대결을 펼쳐야 한다.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을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면서 각자의 비전을 내세워야 할 때다
공병선 기자 mydill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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