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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뜯고 맛보고 적시고…문학은 노벨상, 독서 문화는 ‘이그노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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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한쪽에 전시된 훼손도서 전시회
다양하고 기상천외한 책 훼손 실태 고발
기초 시민의식 확립해야 독서문화 발전

가을 끝자락인 지난 25일 오후 방문한 서울 양천구 목동의 양천도서관 2층 책누리실. 안내데스크를 지나 안쪽에 있는 도서 열람실은 꽤 북적였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 이후 이용객이 늘었냐고 묻자, 양천도서관 관계자는 한강 작가의 작품이나 그가 추천한 작품들을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열람실에는 40여명의 시민이 모여 앉아 독서에 심취해 있었다. 책 종류만큼 읽는 자세는 가지각색이었다. 의자 끝에 엉덩이를 살짝 걸터앉은 남성, 이어폰을 끼고 얼굴을 푹 숙인 여학생, 책 접지선 끝을 살짝 누른 채 필기하는 노인 등 각자 편안한 자세였다. 안내데스크에 부착된 코로나19 재유행 안내문 탓인지 서가 곳곳엔 마스크를 쓴 이들도 보였다.

[르포]뜯고 맛보고 적시고…문학은 노벨상, 독서 문화는 ‘이그노벨상’ 서울 양천구 목동 양천도서관 2층 책누리실 입구 근처에 열린 훼손도서 전시회. 각각의 사연이 담긴 책들이 테이블 위에 진열돼 있다. /최호경 기자 hoc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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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한쪽에선 조그맣게 ‘훼손 도서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오가는 시민들은 테이블 위에 진열된 훼손 도서들에 한 번씩 눈길을 줬다. 슬쩍 보고 가는 이도, 가던 길을 멈추고 살펴보는 이도 있었다. 양천도서관 관계자는 “원래 1년에 한 번씩 독서의 날에 행사를 열었다. 올해는 워낙 훼손 도서에 민원이 많고, 저희가 아무리 계몽한다고 해도 (시민들이) 자각하지 않아 연장하게 됐다”고 밝혔다.


개인 학습지·냄비 받침대 용도에…칼로 잘라내거나 강아지가 물어뜯어
[르포]뜯고 맛보고 적시고…문학은 노벨상, 독서 문화는 ‘이그노벨상’ 온갖 필기구가 지나간 흔적, 강아지가 물어뜯은 흔적, 엎어버린 커피의 진한 얼룩이 책에 남아 있다. 가운데 위치한 책은 내용과 그림이 담긴 것으로 추정되는 일부 페이지가 말끔히 절취돼 있다. /최호경 기자 hocance@

낙서나 밑줄, 심하면 책 일부가 찢긴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으나 가까이서 본 훼손 상태나 유형은 기자의 상식을 뛰어넘었다.


전시된 훼손 유형은 12가지였다. 이 가운데 기자는 ‘절취’ 유형에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그냥 찢긴 게 아니었다. 책 내용과 명화(名畵)가 인쇄된 것으로 추정되는 일부 페이지를 책 가운데 접지선 깊숙이 커터칼 따위로 예리하게 베어냈다. 너무 깔끔히 잘라내 원래 없는 페이지였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또 본인의 목표를 적은 일기 유형, 강아지가 물어뜯은 유형, 냄비 받침대로 써 겉표지가 둥글게 탄 유형, 답과 풀이가 적힌 개인 학습지 유형, 커피를 엎은 유형, 물에 통째로 빠져 젖은 유형, 책이 반으로 쪼개진 유형 등 다양했다. ‘눈으로만 봐주세요’란 테이블 위에 놓인 푯말이 무색해 보였다. 너무 지저분해 손댈 엄두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르포]뜯고 맛보고 적시고…문학은 노벨상, 독서 문화는 ‘이그노벨상’ 책 대출자가 임의로 책을 보수하거나, 냄비 받침대로 사용해 책이 훼손된 사례. 책이 통째로 물에 젖어 훼손된 사례도 전시돼 있다. /최호경 기자 hocance@

육아휴직 중이어서 평일인 이날 도서관에서 들른 반모씨(49)는 여러 훼손 유형 가운데 ‘젖은 책’ 유형이 뇌리에 박힌다고 말했다. 반씨는 “통째로 젖은 책은 복원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절판된 책은 더 구할 수가 없으니, 책값의 5~10배 정도 벌금을 부과할 필요가 있다”며 훼손 수준에 따라 페널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문학 서가로 가서 무작위로 책을 몇 권 뽑아보니 낙서와 밑줄, 구김, 끈적임 등으로 불쾌감을 주는 책들이 나왔다. 서가 도서에 밑줄은 기본이란 사서의 말이 실감 났다. 누군가가 한번 책에 연필로 흔적을 남기면, 다음 사람은 볼펜으로, 그다음 사람은 형광펜으로 칠하면서 책이 누적 훼손된다는 설명이다.

[르포]뜯고 맛보고 적시고…문학은 노벨상, 독서 문화는 ‘이그노벨상’ 문학 서가에서 무작위로 꺼낸 책 한권. 연필과 형광펜으로 그어진 밑줄이 불쾌감을 유발한다. /최호경 기자 hocance@

책을 빌린 고객은 책을 분실하거나 훼손할 경우, 동일한 책이나 금액으로 변상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 조치가 이뤄지는 경우는 드물다. 증거 확보가 어렵기 때문이다. 책이 처음부터 훼손된 상태였다고 고객이 발뺌하면, 도서관 사서들은 어찌 못하고 망가진 책을 보수한 뒤 다시 서가에 꽂아둘 수밖에 없다고 털어놓았다.


일주일에 네 번꼴로 책을 빌리러 온다는 서울 경인초 6학년 구모군(12)과 친구 김송주군(12)은 “사람들이 책을 너무 안 아끼는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김군은 “책이 고마운 줄 알고 잘 대해야 한다”라며 책을 함부로 다루는 어른들을 향해 일침을 놓았다.


최근 5년간 공공도서관 제적·폐기 도서 연평균 증가율 15.3%

양천도서관에서 이용객들이 하루에 반납하는 도서 수는 약 2100권이다. 도서관 측은 이 가운데 적어도 5%인 100권에서 많게는 200권 정도가 훼손 도서라고 보고 있다. 다만 매일 새롭게 훼손되는 도서 수를 정확히 알아내긴 어렵다고 한다. 매일 들어오는 반납 도서에는 새롭게 훼손된 도서뿐 아니라, 과거에 훼손이 발생해 상태가 나빠졌거나, 계속 훼손과 보수를 거듭하는 도서들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공공도서관 한 곳마다 제적 또는 폐기되는 도서 수는 해마다 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해 공개한 ‘2023년 공공도서관 통계조사 결과보고서’를 보면, 최근 5년(2018~2022년)간 공공도서관 1관당 연간 제적·폐기 도서 수는 2018년 2526권에서 2019년 3050권, 2020년 3672권, 2021년 4085권, 2022년 4441권으로, 연평균 15.3%씩 증가했다.

[르포]뜯고 맛보고 적시고…문학은 노벨상, 독서 문화는 ‘이그노벨상’ 25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양천도서관 2층 책누리실에서 시민들이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다. /최호경 기자 hocance@

제적은 이용 가치 상실·회수 불능·훼손·소재 불명 등의 이유로 도서를 등록대장에서만 삭제하는 것이다. 폐기는 도서 자체를 없애는 것을 말한다. 폐기 도서는 매각, 소각하거나 다른 기관으로 기증 처리한다. 보통 활용도가 떨어진 책과 달리 훼손이 심한 책은 기증하지 않는다는 것이 양천도서관 측의 설명이다.


21년째 사서로 재직 중인 양천도서관 A주무관은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글귀라도 다른 사람은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며 낙서나 밑줄 긋기 같은 비양심적 행동을 지적했다. 물에 책을 빠뜨리거나, 강아지가 물어뜯도록 놔두는 행동에도 주의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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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근 문화평론가는 “공용 물건을 함부로 훼손하는 것은 독서 문화를 따지기 전에, 가장 기초적인 시민 의식조차 실종된 상황”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독서를 한들 무슨 교양이 되고 우리 사회의 발전으로 이어지겠나”라고 꼬집었다. 이어 “함께 쓰는 물건이나 장소에 대해선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쳐선 안 된다는 원칙을 숙지하고, 이러한 시민의식이 바탕이 된 상태에서 독서문화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호경 기자 hocance@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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