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총리 주재 국무회의에서 '효력 정지' 의결
尹 재가하면 '文정부 대북정책 상징' 종잇조각
군, 北 추가 도발하면 확성기 본격 가동할 듯
북한의 '오물 풍선 도발'로 정부가 9·19 남북 군사합의 효력을 전면 중단하는 결단을 내렸다. 북한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확성기 재가동까지 거론되는 상황에서 남북 중 누가 먼저 '레드라인'을 넘을지를 놓고 긴장도가 높아지는 흐름이다.
정부는 4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고 9·19 군사합의 효력을 전면 중단하는 안을 의결했다. 한 총리는 "북한의 파기 선언으로 유명무실화된 군사합의가 우리 군의 대비 태세에 많은 문제점을 초래하고 있다"며 "남북 상호 신뢰가 회복될 때까지 군사합의 전부의 효력을 정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북한의 도발에 충분하고 즉각적인 조치가 가능해질 것"이라며 "북한은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도발을 즉각 중단하라"라고 덧붙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재가하면 문재인 정부의 상징과도 같던 9·19 군사합의는 6년을 채우지 못하고 휴지 조각이 된다. 군사합의는 2018년 9월 3차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체결됐다. 그해 4월 발표된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이자 9월 평양공동선언의 부속 합의서다. 그러나 북한은 기록적인 도발 끝에 지난해 11월 먼저 '전면 폐기'를 선언했다. 사실상 효력을 잃은 상태에서 남측만 얽매여온 것이다. 정부의 효력 정지로 군의 대비 태세에 지장을 초래해온 족쇄가 풀린다. 확성기 재가동부터 군사분계선(MDL) 일대에서 금지됐던 실사격 및 야외 기동훈련 등을 합의 이전처럼 제약 없이 실시할 수 있게 됐다.
일각에선 판문점 선언까지 파기해야 확성기를 가동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판문점 선언에는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확성기 방송과 전단 살포를 비롯한 모든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그 수단을 철폐한다"고 명시돼 있다. 반면 군사합의에선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했다"고 다소 포괄적으로 다뤄졌다. '해석의 영역'이지만 정부의 판단은 이렇다. 판문점 선언은 국무회의 의결이나 국회 비준 동의를 거치지 않아 '정식 남북 합의서'로 인정할 수 없고, 별도의 효력 정지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군사합의 역시 국회 비준 동의를 받진 않았지만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공포했다.
현행 남북관계발전법은 대북 확성기 가동을 금지하고 있지만 '남북 합의서 효력이 정지된 때'엔 처벌받지 않는다는 단서 조항이 달려 있다. 정부는 국무회의를 거쳐 군사합의 효력을 정지하는 것만으로도 이 조항을 충족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軍, 확성기 설치부터…가동 여부는 북한에 달려
군 당국은 군사합의 효력 정지에 따라 금명간 일부 전방 부대에 대북 확성기를 설치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당장 가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북한이 오물 풍선을 추가 살포하는 등 도발에 나설 경우 즉시 방송을 재개하겠다는 방침이다.
문제는 다음 시나리오다. 누가 먼저 '레드라인'을 넘는지에 따라 충돌의 책임이 돌아갈 공산이 커졌다. 북한은 지난 2일 밤 오물 풍선 중단 방침을 밝히면서 남측에서 대북 전단이 살포되면 '100배로 보복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다음 행동의 공을 남측에 돌린 것이다. 우리 군의 전방 훈련 재개, 확성기 설치, 대북 전단 살포를 빌미로 도발을 재개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일부 대북 단체는 전단을 추가 살포하기 위한 준비를 마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는 '자제 요청'도 어렵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대북전단금지법에 위헌 결정을 내린 취지에 따라 '표현의 자유' '북한 주민들의 알 권리' 등을 우선하겠다는 입장이다. 다만 북한에 빌미를 내주지 않기 위해 물밑에서 자제를 당부하거나 비공개 살포를 요청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한 소식통은 "대북 전단을 공개적으로 살포하면 북한도 가만히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걸 문제 삼아 도발하는 것"이라며 "여러 단체가 비공개로 전단을 살포해온 것처럼 일부 단체가 전단 살포를 불필요하게 알리지 않도록 당부할 필요는 있다"고 했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석좌연구위원은 북한이 다음 도발을 감행할 때 '위장 대남단체'를 등장시킬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북한이 이런 시나리오를 준비하진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정부가 확성기 카드를 거론하자 꼬리를 내린 모습이 되지 않았느냐"라며 "북한으로서도 뼈 아픈 대목"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오물 풍선 살포가 '표현의 자유'라는 김여정의 주장을 정부가 일축한 만큼 다음 도발에는 북한 당국이 조종하는 대남단체를 등장시켜 도발의 주체로 이용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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