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 큐브서 만난 조현래 한국콘텐츠진흥원장
걷기와 백팔배로 낮은 곳 보며 삶의 균형 맞춰
"콘텐츠 지원에도 필요한 자세…자양분 공급해야"
"젊은 친구들 자존감 높여야 전문가로 성장해"
조현래 한국콘텐츠진흥원장은 출근 전에 두 가지를 한다. 걷기와 백팔배(百八拜)다. 새벽에 일어나면 신발부터 신는다. 나주혁신도시 전망이 한눈에 들어오는 배메산에 오른다. 호수공원과 산마루를 1시간 정도 걸으며 정신을 깨운다. "무의식적으로 40분 정도 걷다 보면 머리에서 반응이 온다. 혈액 순환 덕인지 한순간 정신이 맑아진다. 무엇이든 시작해도 될 듯한 느낌이다. 전날 음주했다면 숙취도 사라지고. 가뿐한 몸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돌아오면 30분 동안 백팔배를 한다. 불교 신자는 아니다. 집에서 간단히 할 수 있는 운동을 찾다가 시작했다. 백여덟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중생을 괴롭히는 백여덟 가지 괴로움이다. 절하다 보면 온갖 괴로움이 사라진다. 조 원장은 최근 진정한 가치를 체감한다. "머리를 계속 바닥으로 숙이니까 자신을 내려놓게 되더라. 마음이 비워진달까. 불교에서 말하는 무념무상 상태에 가까워진다. 많은 사람이 높은 곳만 바라보고 산다. 낮은 곳을 함께 보며 삶의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 내 삶뿐만 아니라 콘텐츠 지원에도 필요한 자세다."
창·제작 현장에서 해답을 찾으며 생긴 직업관이다. 이날도 '오징어 게임' 시즌2 촬영이 한창인 스튜디오 큐브를 꼼꼼하게 점검했다. 대전 유성구에 있는 공공 제작 인프라다. 급변하는 영상 콘텐츠 시장에 대응하려고 영화·드라마 관계자들의 의견을 반영해 스튜디오와 제반 시설을 구축했다. '오징어 게임' 시즌2는 국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스튜디오 A(1136평)에서 제작된다. 다음 달 촬영을 마치면 연내 공개를 목표로 후반작업에 착수한다.
"넷플릭스에서 가장 성공한 시리즈 아닌가. 높은 완성도로 각양각색의 K-콘텐츠가 나올 길을 닦아주길 기대한다. 볼거리가 너무 많은 세상이다. 치열해진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 질적 수준을 높여야 한다. 그게 한류를 지속할 힘이다. 자양분을 열심히 공급하며 뒷받침하겠다."
-오늘 아침에도 걷기와 백팔배를 했나.
"물론이다. 가장 간편한 운동이다. 식사 전후 등 조금만 시간이 나도 할 수 있다. 돈을 들일 필요도 없고. 목표를 정해두진 않는다. 단 원칙은 있다. 버스 한두 정거장 거리를 이동해야 하면 무조건 걷는다. 그렇게 생활화하다 보니 평균 1만5000보 이상을 기록하더라."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겠지만 요즘 같은 봄에는 눈이 즐거울 것 같다.
"고목에 솟은 싹 등을 보며 자연의 변화를 체감한다. 차를 타고 이동하면 볼 수 없다. 한때는 눈에 담으려고 인왕산에 자주 올랐다. 바위틈에서 자란 나무들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돌덩이를 뚫고 뿌리를 내리면서 뒤틀어진 형태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목재로서 가치는 없다지만 귀하다. 잡초도 마찬가지다. 혹자는 경쟁력이 없는 풀이라고 깎아내린다. 하지만 다른 식물이 없는 지역에 터를 잡고 살아내는 힘도 귀한 능력이다."
-산길을 걸으면서 순수한 마음을 회복하는 듯하다.
"산에 오르면 사람들이 착해진다. 바위틈에 끼여 위태롭게 선 나무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뿌리 쪽에 생긴 공백에 흙을 메워서 잘 자라게 도와준다. 그런 온기가 전해지면 복잡했던 마음이 편해진다."
-대체로 혼자 걷는다고 들었다.
"다른 사람이 싫어할 수 있으니까(웃음). 머릿속을 비우려면 혼자 걷는 편이 낫다. 이야기하면서 걸으면 생각만 많아진다. 그렇게 도달하는 결론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고. 공부랑 똑같다. 10시간 내내 한다고 해서 성적이 오르겠나. 45분을 하면 15분을 쉬어줘야 한다. 머릿속을 틈틈이 정리해야 수월하게 암기할 수 있다."
-건강을 유지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나.
"물론이다. 인간은 달리려고 태어나지 않는다. 구조상 걷기에 최적화돼 있다. 어떤 동물보다 오래 걸을 수 있다. 전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정도다. 태생적으로 물려받은 능력이라면 계속 써야 마땅하다. 그게 자연의 이치다."
-백팔배의 의미는 조금 다를 듯하다.
"자신을 낮추는 일종의 준비 자세다. 시작은 운동이었다. 동쪽 창문을 열어두고 뉴스나 음악을 들으며 반복했다. 몇 번 해보니까 명상이 되겠다는 감이 오더라. 고요한 분위기로 바꾸고 조용히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해지더라. 땀도 뻘뻘 나고. 다시 높은 곳을 바라볼 자신이 생겼다."
-업무 등으로 받는 스트레스도 걷기와 백팔배로 해소하나.
"솔직히 스트레스가 많지 않다. 평소 기대가 크지 않아서다. 물론 머리가 복잡할 때는 혼자 걸으며 문제를 정리하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다. 기대나 고정관념을 버리면 답이 보일 때가 많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이해할 여지도 생기고. 상황을 받아들일 힘이 생긴다."
-조직원들과 두루 소통하기로 유명하다. 막내 사원을 직접 챙기는 모습을 목격한 적도 있다. 그들의 아이디어나 생각을 꽤 중요하게 여기는 듯하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직원이 에듀코카(콘진원이 운영하는 온라인 교육 사이트) 시스템을 싹 바꾼 적이 있다. 접속자가 급격히 늘었길래 정례회의에서 직접 발표하라고 했다. 팀장이나 국장이 할 수도 있었지만, 변화를 주도한 당사자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어떻게 젊은이들의 행동 양식과 가치관을 꿰뚫어 보고 사이트에 반영했는지를 조직 전체가 공유하길 바랐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그런 기회를 주면 부끄러워하지 않고 곧잘 발표한다. 그렇게 자존감을 높여야 맡은 분야에서 전문가가 된다. 애사심도 커지고."
-젊은 직원과 대화를 잘 풀지 못하면 '꼰대'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꼰대는 나이와 무관하다. 아무리 젊더라도 자기 방식을 강요하면 그렇게 된다. 꼰대로 느껴지기 쉬운 위치에 있는 만큼 최대한 강요하지 않고 이야기를 경청하려고 한다. 그게 콘진원 운영에도 도움이 되더라. 훈수를 두는 사람이 다음 수를 더 잘 내다보지 않나. 내 생각과 거리를 둬야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콘진원은 방송, 웹툰, 캐릭터, 패션, 게임 등 분야의 지원을 모두 관리한다. 관련 콘텐츠를 모두 챙겨보거나 경험하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선별하는 방법이나 원칙이 있을 듯한데.
"직원들이나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공감을 나눌 콘텐츠를 추천받는다. 최근에는 모바일 게임을 내려받았다. 능숙하지 않아도 틈틈이 도전한다. 드라마는 아내가 선별해준다. 전문가다(웃음). 주말에 나란히 앉아 한꺼번에 몰아서 본다."
-가장 인상 깊게 본 드라마는 무엇인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다. 자폐 스펙트럼이란 '다름'을 잘 표현했다. 우리 옆에는 언제나 다름이 있다. 그걸 다루는 방식이 무척이나 새로웠다. '소년심판'도 우리 사회가 갖춰야 할 시각을 유려하게 그려내 의미가 있었고."
-성장하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듯하다.
"거기에 K-콘텐츠의 저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농담처럼 하는 비교가 있다. 서양에선 용이 알을 낳는다. 동양에선 '등용문'이라는 말처럼 물고기가 힘든 과정을 거쳐 협곡을 오르고. 몇백 년 동안 체질을 완전히 바꿔서 용으로 성장한다. 차이는 영웅들에게서도 나타난다. 미국의 스파이더맨은 거미에 물려서 초인이 된다. 아이언맨은 최신 기계의 힘을 빌려 특별해지고. 동양은 다르다. 험난한 수련 과정을 통과해야 비로소 무공을 세우고 한 조직의 리더로 거듭난다. 어느 쪽이 시청자와 정서적으로 더 맞닿아있을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한국 창작자들은 그걸 공감하게 하는 솜씨가 탁월하다."
-그런 요소를 갖춘 다수 콘텐츠가 문체부와 콘진원이 만든 영상제작시설 스튜디오 큐브에서 제작돼 흥행에 성공했다. '오징어 게임'을 비롯해 '스위트홈' '미스터선샤인' '올빼미' '환혼' 등이다.
"많은 창작자로부터 상상력을 발휘하는 공간으로 선택받아 뿌듯하다. 콘진원에 오기 전부터 이런 스튜디오가 생기길 바랐다. 한류 드라마의 성공 이면에서 허름한 물류창고를 전전하는 열악한 환경을 여러 번 목격했기 때문이다. 고화질 방송 제작과 송출 기술 발전을 생각해서라도 실제 구조물과 같은 현실성 있는 세트장이 필요했다."
-중대형 스튜디오 여섯 곳이 하루도 빠짐없이 사용된다고 들었다.
"최근 3년 동안 가동률이 100%다. 영화·드라마 관계자들의 욕구를 충족해 입소문이 난 듯하다. 처음 공간을 구상할 때부터 창·제작자에게 필요한 시설을 우선시했다. 지난해 9월 개관한 다목적 수상 스튜디오도 마찬가지다. 인공강우, 해양 재난 등과 같은 특수촬영이 많아져 수요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민간에서 요구하는 높은 비용 부담을 덜어주면 관련 산업이 성장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년에는 LED 월, 인카메라 등을 갖춘 버추얼 스튜디오를 구축한다. 제작사들이 해외 촬영이나 후반작업에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을 모두 줄일 수 있으리라 예상한다."
-재임 기간 이루고 싶은 또 다른 목표가 있을까.
"처음 취임했을 때부터 '일 잘하는 기관의 장(長)'이라고 평가받고 싶었다. 그동안 많은 칭찬과 응원을 받았지만 아직 많은 과제가 남아있다. 하나하나 제대로 해결하려면 조직원들이 현장의 목소리에 경청하며 안목을 높여야 한다. 단순히 담당 분야만 들여다봐선 곤란하다. 다른 분야까지 종합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새로운 시도를 유도해내는 유연성을 발휘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대전=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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