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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담(手談)]정상의 그늘에 가려진 또 하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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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 208. 중봉(中峰)의 주소다. 평범해 보이는 그 이름에도 아픈 사연이 있다. 대한민국 국립공원 1호라는 지리산. 수많은 이가 지리산을 찾지만 중봉을 거쳐 가는 이는 많지 않다. 중봉은 대원사로 향하는 산객(山客)이 잠시 숨을 고른 뒤 흙먼지만 남기고 떠나는 그런 곳이다.


등산 애호가가 아니라면 중봉의 존재 자체를 모를 수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중봉이 한반도 남쪽 땅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라는 사실이다. 지리산 천왕봉(1915m)에 버금가는 1874m의 높이를 자랑한다. 설악산 대청봉이 1708m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중봉의 높이를 가늠할 수 있다.


구름 위로 우뚝 솟은 중봉이 그 위용에 걸맞지 않게 존재감이 미미한 이유는 천왕봉의 존재 때문이다. 민족의 정기를 품은 곳이라는 천왕봉은 그 자체로 역사다. 주말이면 수많은 이가 심야에 지리산에 오른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을 보기 위함이다. 다리에 경련이 올 정도로 온 힘을 쥐어짜야 오를 수 있다는 그곳.


[수담(手談)]정상의 그늘에 가려진 또 하나의 역사 백두대간의 한 축인 구름 속의 지리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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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천왕봉에 오른 이의 대다수는 중산리와 장터목 방향으로 하산한다. 잰걸음으로 30분이면 닿을 거리에 중봉이 있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이는 소수의 ‘화대종주’ 산객뿐이다.


한반도 남쪽 땅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이미 올랐기에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의 존재는 까맣게 잊은 것일까. 중봉은 오늘도 그렇게 잊힌 존재로 그곳에 외롭게 서 있다. 세상에는 중봉과 유사한 처지로 사는 이들이 있다. 정상의 그늘에 가려 존재 자체가 희미해져 버린 이들.


바둑계도 예외는 아니다. 모든 관심은 정상에 쏠려 있다. 세계 바둑 최강인 신진서 9단. 한국기원에 따르면 신진서는 20일 현재 60승 7패로 승률 1위(0.895)를 질주 중이다.


신진서는 지난해는 물론이고 2021년, 2020년에도 승률 1위를 차지했다. 산으로 비유한다면 천왕봉 같은 존재다. 신진서 기록을 넘지 못해 2위에 머문 이들은 누구일까. 심재익 6단, 김채영 8단, 이원영 9단, 류민형 8단….


[수담(手談)]정상의 그늘에 가려진 또 하나의 역사

바둑 애호가가 아니라면 이름조차 낯설게 느껴질 이들이다. 심재익은 2020년, 김채영은 2021년 다승 순위 2위를 차지했다. 이원영은 2020년, 류민형은 2021년 승률 2위를 기록한 인물이다. 당시 다승과 승률 1위는 모두 신진서다.


1998년생인 심재익은 2017년 프로에 입단했으며 지난해 11월 6단으로 승단했다. 1996년생인 김채영은 김성래 4단의 장녀이자 국내 최초 3부녀 프로기사 가족으로 유명하다. 권갑용 도장 출신인 이원영은 1992년생으로 2021년 9단으로 승단한 인물이다. 1991년생인 류민형은 프로기사 류동완과 형제다. 장수영 바둑도장 출신으로 지난해 8단으로 승단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세계 최강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국내 기전에서 유의미한 역사를 써온 기사라는 점이다. 그들의 발걸음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역사다. 1등만 기억하는 사회는 신명 나는 세상과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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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의 그늘에 가려진 역사를 함께 발굴하고 기억하는 세상. 우리가 꿈꾸는,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세상은 그런 모습 아니겠는가.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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