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2007년 아이폰 발표회에서 SW·HW통합 강조
자체 반도체 설계·개발 암시 남겨
쿡, 2000년 '애플 실리콘' 발표‥마지막 퍼즐 풀어
"실리콘은 하드웨어의 핵심"
"세계적 수준의 실리콘 설계팀은 '게임체인저'"
"소프트웨어에 '찐'인 사람은 하드웨어도 직접 만들어야 한다(People who are really serious about software should make their own hardware)."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는 2007년 첫 아이폰을 소개하던 중 이렇게 말했다. 운영체제(OS)와 하드웨어를 직접 만드는 애플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표현이다. 잡스는 이 말이 30년 전 앨런 케이(Allan Kay)가 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케이는 잡스에게 매킨토시 컴퓨터를 개발할 영감을 준 제록스(지금 독자가 사용 중일 수도 있는 복사기를 만드는 그 회사다) PARC 소속의 컴퓨터 과학자였다. 잡스는 1979년 PARC를 방문한 후 자신이 만든 PC와는 전혀 다른 '매킨토시'를 만들 결심을 한다. PARC에서 본 그래픽유저인터페이스(GUI)와 마우스 아이디어는 잡스에게는 충격이었다.
케이는 소프트웨어 전문가다. 객체지항적 프로그래밍과 'C++'언어의 시초인 '스몰토크'를 만들었다. 케이는 소프트웨어에 멈추지 않고 '다이나북'이라는 태블릿PC의 원형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결합을 강조했다. 잡스는 그런 케이를 애플로 끌어들였다. 케이는 컴퓨터 애니메이션 제작사 픽사(Pixar)와 잡스를 연결해 주기도 했다. 잡스가 애플에서 밀려나있던 시절 투자한 픽사는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를 통해 대 성공을 거뒀다. 이쯤되면 케이가 잡스에게 미친 영향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할만 하다.
잡스는 GUI 를 사용한 매킨토시를 개발했지만 빈 구석이 있었다. PC를 작동시킬 CPU에는 여전히 애플이 아닌 다른 회사의 상표가 찍혀있었다. 케이의 주장은 완전히 실현할 수 없었다. 1980년대 PC 회사가 반도체를 생산하는 것은 상상 밖의 일이었다. 그 역할은 인텔, 모토로라, IBM의 몫이었다.
잡스의 아이폰 발표 키노트가 끝날 무렵 전설적인 아이스하키 선수 웨인 그레츠키Wayne Gretzky)의 말이 스크린에 투영됐다. 잡스는 평소 좋아하는 말이라면서 운을 뗐다. "나는 '퍽'이 있던 곳이 아니라 '퍽'이 갈 곳으로 스케이트를 탄다(I skate to where the puck is going to be, not where it has been.”
케이는 아이폰 발표 장에서 자신의 발언이 화면에 뜨는 것과 아이폰의 등장을 지켜봤다. 케이는 미국판 네이버 지식인 '쿼라'(quora)에 올린 글을 통해 당시 잡스와 나눈 이야기를 소개했다. 케이는 잡스가 아이폰을 쥐어주면서 "이정도면 비판할만 하지 않냐"고 물었다고 했다. 케이의 대답도 예사롭지 않았다. 케이는 손으로 아이패드 만한 크기를 그려 보이며 "스티브, 이정도 크기로 (아이폰을) 만들면 당신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케이는 아이폰 발표를 보며 애플이 다이나북/아이패드와 비슷한 제품을 이미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잡스가 아이폰을 먼저 발표한 것은 마케팅적인 결정이었을 뿐이라고 판단했다.
잡스는 왜 하필 아이폰을 발표하는 역사적인 날 케이와 그레츠키를 '소환'했을까. 케이와 그레츠키의 발언은 묘하게 겹친다. 발언의 배경을 살펴보자. 잡스는 이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만드는 애플이 맥 컴퓨터의 운영체제이던 'OS X'를 아이폰으로 가져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케이의 발언을 소개했다. 그레츠키의 발언을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아이폰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결합해 경쟁자들이 가지 못하는 길을 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았을 것이다. 사실상 애플이 사용하는 모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애플이 통제하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당시는 이말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었다. 잡스가 케이를 소환한지13년이 지난 2020년. 케이가 길을 제시한 잡스의 예언은 현실이 됐다. 애플 전용 PC용 반도체의 등장이었다. 인텔과 같은 전문 반도체 회사에 의해 주도되던 세계 반도체 역사가 다시 쓰여진 결정적 장면이다.
2020년 6월26일은 반도체 회사에서 PC회사가 독립을 선언하는 날이었다. 전세계가 전대미문의 코로나19 공포 속에서 애플은 '비밀 병기'를 공개했다. 애플 PC에 사용하던 인텔의 CPU를 대신할 시스템온칩(SoC)이었다. 비록 잡스는 없었지만 그가 남긴 애플 실리콘의 유산은 태산처럼 커져오고 있었고 쿡의 손을 통해 세상에 나올 차례였다.
팀 쿡 최고경영자는 텅빈 객석을 마주하고 홀로 연단에 섰다. 아무도 없는 객석이 유달리 두드러져 보였다. 객석의 침묵 속에 쿡의 목소리만이 극장에 퍼져나갔다. 코로나19는 이렇게 반도체 역사에 길이 남을 순간을 훼방 놓았다. 평상시라면 스티브 잡스 극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 속에 쿡이 "한가지 더(one more thing)"을 외쳤겠지만 이번은 달랐다. 애플실리콘은 인터넷을 통해 영상으로 소개됐다. 관중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이 발표되는가가 핵심이었다.
"오늘은 맥의 역사에서 진정 역사적인 순간이다" 쿡은 애플 실리콘을 소개하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행사에서 맥PC의 역사적인 장면으로 세 곳을 지목했다. 모토로라 CPU에서 애플·IBM·모토로라가 함께 한 파워PC로의 전환, 맥OS의 도입, 그리고 파워PC에서 인텔 CPU로의 전환이었다. 쿡은 이들 순간보다 더 중요한 날이 애플 실리콘의 발표라고 자신했다. 애플 역사상 가장 중요한 혁신이 반도체임을 강조한 셈이다.
쿡은 애플 실리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애플에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통합은 모든 일의 기본이다. 그것이 우리 제품이 훌륭한 이유이다. 실리콘은 우리 하드웨어의 핵심이고 세계적 수준의 실리콘 설계팀을 보유하는 것은 '게임 체인저'이다."
애플 실리콘을 발표하는 쿡의 목소리에서 13년전 잡스 발언의 흔적이 보인다. 쿡은 2007년 잡스가 언급했던 '역사적인'(historic) 발전'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애플 실리콘의 책임자 조니 스루지는 이렇게 설명한다. 스루지는 아이폰에서 시작된 애플 실리콘이 아이패드, 애플워치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설명한다. 그는 "궁극적으로 우리는 SoC를 Mac으로 가져오면 훨씬 더 나은 제품을 만들 수 있다. 이것이 실리콘과 소프트웨어의 긴밀한 통합의 결과이다"라고 설명했다. 맥, 아이팟, 아이폰의 뒤를 이을 더 큰 혁신을 위한 기반이 애플 실리콘이라는 의미이다.
5개월 후 애플의 첫 PC용 반도체 'M1'이 등장했다. 쿡의 공언대로 애플 실리콘 설계팀의 성과는 놀라왔다. 연산 코어와 그래픽 코어, AI 연산을 모두 통합한 M1은 CPU와 그래픽칩을 별도로 사용해온 기존 PC의 문법을 무너뜨렸다. 성능과 전력소모도 경쟁사를 압도했다. 단번에 반도체 업계의 흐름을 바꿀 상황이 펼쳐졌다.
애플은 반도체를 통한 변화를 예감하고 이미 실행에 옮겼다. 애플의 고급 모니터 '스튜디오 디스플레이어'에는 아이폰에 사용하던 A13 칩이 들어갔다. 앞으로는 M1이나 M2칩을 사용한 모니터도 선보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최신 칩을 컴퓨터가 아닌 모니터에 사용해 더욱 강력하고 혁신적 기능을 선보이겠다는 의미이다. 모니터는 시작일 뿐이다. 애플의 목표가 여기서 끝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더 큰 목표가 있을 것임은 분명하다.
백종민 기자 cinqang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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