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베이징=김현정 특파원] 중국의 한한령(限韓令·한류 제한령) 해제 기대감에 관련주 찾기 바람이 분다는 소식이 한국에서 들려온다. 수년 전 중국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화장품 업체와 게임 업체, 콘텐츠 업체들의 주가도 들썩이는 모양새다. 한한령은 정말 끝을 향해 가고 있을까.
그러나 이 문제는 답하기 간단치 않다. 한한령 해제의 키를 쥐고 있는 중국은 애초에 한한령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난달 중국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플랫폼에 한국 영화 서비스가 6년 만에 재개된 가운데, 이것이 한한령의 해제를 의미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한한령을 시행한 적이 없다"는 황당한 답을 내놨다. 한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결정 이후 한중관계와 관련한 각자의 해석이 끝없이 헛돌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 중 하나다.
사드 부지를 제공한 기업의 영업장 폐쇄에는 위생검사와 소방점검이, 한국 드라마와 각종 게임 및 영화 유통이 중단된 것에는 문화계의 자발적 판단과 행동이라는 명목상의 이유가 중국에는 존재한다. 한국에 대한 보복 감정과 정부 차원의 조직적 움직임에 대해 중국은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다. 그만큼 한한령은 보이지 않는 장벽이자, 손에 잡히지 않는 무기다. 조용히 시작됐다가 사라질 수 있지만, 마찬가지로 기척없이 언제든 재개될 수 있다는 얘기다.
한한령 해제를 둘러싼 기대감을 바라보자면 또 다른 측면에서 께름칙한 기분이 든다. 중국 내 한국 제품과 콘텐츠 성과 부진의 원인을 오로지 한한령에서만 찾는 것은 온당할까. 한한령이라는 망령이 사라지고 나면, 모든 메이드인코리아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 문만 열리면 우리 것은 다 통하게 돼 있다는 기대는 오만과 자만이 아닐까.
한 때 중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한국의 화장품들은 이제 현지에서 찾는 사람이 없다. 번화가마다 간판을 번쩍이던 매장은 거의 사라졌고, 그마저도 대체로 직원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 소식통은 "지난 3년 동안 제로코로나 탓에 문을 걸어잠그면서, 더 많은 중국인들이 자연스레 자국 화장품에 눈을 돌리고 '써보니 나쁘지 않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처음엔 정부의 의도적 검역·통관 강화 등으로 유통에 제한을 받은 탓에 판매가 부진했지만, 이제는 질적 성장을 이룬 중국의 저가 브랜드와 해외의 초고가 브랜드로 양분된 시장에서 한국제품은 설 자리가 애매해져 버린 것이다. 최근 만난 한 업계 관계자는 한국 게임을 두고도 "중국의 제작기술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면서 "중국 정부의 강한 게임산업 규제가 없었다면, 한한령이 없어도 한국 게임은 승부를 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한국 외교의 가장 고질적 병폐로 지나치게 낙관적인 접근과 조급한 반응을 꼽는다. 한한령 해제를 바라보는 일부의 시선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섣불리 축포를 터트리기 전에, 잘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기 전에, 한국 제품과 콘텐츠가 과거의 경쟁력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지부터 진단할 필요가 있다.
베이징=김현정 특파원 alpha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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