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서소정 기자] ‘물가 안정’.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관 로비에 걸려 있는 대리석 현판에 새겨진 문구다. 지금은 건물 리모델링 중으로 한은이 삼성 본관빌딩으로 잠시 옮긴 상태지만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위치한 커다란 글귀는 한은의 존립 이유를 대변해준다. 수년간 한은에 몸담았던 한 임원은 "현판을 볼 때마다 묘한 사명감이 샘솟았다"고 회고했다.
코로나19에 대응해 돈을 풀었던 국가들이 인플레이션 역풍을 맞으면서 각국 중앙은행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까지 물가를 자극하자 각국은 금리 인상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상에 앞서 지난해 8월부터 선제적으로 기준금리 인상에 나섰던 한은은 올해 1월 금리를 1.25%로 올린 후 숨고르기에 나섰다가 미 금리 인상이 본격화되면서 다시 올릴 채비를 하고 있다. 설상가상 미 Fed가 치솟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연이은 ‘빅스텝’(한 번에 0.5%포인트 인상)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각국 중앙은행의 긴축 시계는 더욱 빨라질 전망이다.
각국이 고물가와 씨름하는 주요한 시기, 한은은 차기 수장을 맞을 준비에 분주하다. 지난 8년간 국내 통화정책을 이끌었던 이주열 총재가 이날 임기를 마치지만, 바통 터치는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정권교체기라 당초 예상보다 차기 총재 지명이 늦어진 데다 인사를 둘러싼 신·구 갈등이 점화됐다. 앞으로 후보자의 청문회 일정까지 소화하려면 내달 14일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금융통화위원회가 총재 없이 열리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우리 경제를 둘러싼 대내외 환경이 시시각각 급변하고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우려감이 커지는 이유다.
이런 분위기를 의식한 듯 이창용 한은 총재 후보자는 귀국 소감에서 "개인적으로 무한한 영광이지만 지금 전 세계 경제 여건이 굉장히 빠르게 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책을 맡을 가능성이 있어서 마음이 무겁다"고 밝혔다. 30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한 이 후보자는 통화정책 방향을 묻는 기자들의 질의에 "미국 통화정책 정상화·우크라이나 사태·중국 경제 둔화 세 가지 리스크 실현으로 통화정책 결정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재직 당시 발간한 보고서에서 세 가지 리스크가 실현되면 정책을 결정하기 쉽지 않을 것으로 봤는데 이 세 가지가 모두 실현돼 통화정책을 결정하기에 더욱 진중함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 2월 한은의 금리 동결 결정도 우크라이나 사태가 전면전으로 확대되지 않을 것이란 가정하에 이뤄진 것이라 변화에 따른 국내 경제 영향 등을 더욱 면밀히 따져 정책을 수립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시장에서는 이 후보자가 첫 지명 소감에서 물가·금융 안정에 앞서 ‘성장’을 언급하면서 경기에 우선한 기준금리 인상에 나서지 않겠냐는 관측도 내놓는다. 평소 한국의 구조적 성장 잠재력 약화 등을 우려한 이 총재가 부임하면 상대적으로 성장에 무게를 두면서 통화긴축 선호가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 경제가 발빠른 통화정책을 내놓으면서 그야말로 총성 없는 통화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물가 안정·경기 회복 등 상이한 목표를 받아든 한은의 섬세한 통화정책 조율이 여느 때보다 중요하다.
서소정 기자 ss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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