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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호랑이보다 무서운 속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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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전진영 기자] "거듭 사과드리겠습니다. 속기록에서 삭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7일 자유한국당 소속 여상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은 국정감사 도중 김종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X신 같은게”라고 욕설을 뱉은 것을 사과하고 속기록 삭제를 요청했다. 이에 정성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안타깝게도 속기록에 한 번 기재되면 삭제가 불가능하다. 약간의 취지 수정만 가능하다”고 답했다. 여 위원장은 과연 속기록에서 본인의 발언을 삭제할 수 있을까.


[기자수첩] 호랑이보다 무서운 속기록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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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장에서 국회의원들의 속기록 정정 요청은 자주 있는 편이다. 지난 9월 3일 최기영 당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박성중 자유한국당 의원은 “아내 하나 제대로 관리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과기부를 제대로 관리할 수 있겠나”라고 후보자에게 질의했다. 그러자 신용현 바른미래당 의원과 노웅래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은 박 의원에게 “자칫 오해를 부를 수 있으니 속기록에서 삭제하는 것이 어떤가”라고 묻기도 했다.


속기록 정정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국회법 117조는 ‘속기로 작성한 회의록의 내용은 삭제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만 국회법과 ‘국회 회의록의 발간 및 보존 등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발언의 취지를 변경하지 아니하는 범위 안에서 법조문·숫자 등을 착오로 잘못 발언한 경우, 특정한 어휘를 유사한 어휘로 변경하는 경우, 간단한 선후문구를 변경하는 경우 등에 한해 자구정정 신청을 할 수 있다.


국가기밀사항이나 주민등록번호 등의 민감한 개인정보에 해당하는 ‘불게재 사항’의 경우는 공개 회의록에서 빠지는 대신 열람이 불가능한 보존 회의록에 게재된다.


결국 국회법에 따라 박 의원의 발언도 “‘아내와 회계 관리도 못 하는 사람이다’ 이런 쪽으로 수정을 해 주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라는 수정 요구와 함께 속기록에 그대로 남았다.


여 위원장 역시 본인의 발언을 삭제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국회사무처 관계자는 “해당 욕설은 회의장에 있던 모든 의원들이 들었고 반박했던 사안이기 때문에 정정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설령 자구정정 신청을 하더라도 받아들이긴 어렵다”라고 설명했다.


이은재 한국당 의원의 “겐세이 놓으신 것 아니냐”라는 발언이 이 의원의 정정요구 신청에도 불구하고 회의록에 실린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사관이 모르게 기록에서 빼달라는 1404년 태종의 부탁까지 그대로 기록돼있다. 무엇을 지우고 남길 것인가를 기록의 대상이 요구할 수 없다는 의미다.



당시 임금에게 속기록은 호랑이보다 무서운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20대 국회 속기록 정정요구 신청은 50건이 넘는다. 욕설과 고성이 난무하는 20대 국회에서 의원들은 무엇을 지우고 싶은 걸까.




전진영 기자 jintonic@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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