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본 한일갈등]<3>혐한시위 현장의 두 목소리
‘헤이트 스피치 억제법’ 피해가려 “한국 죽어라”에서 “조총련 죽어라”로 위장
우익 혐한에 맞서는 ‘카운터 시위대’ 헤이트 스피치 압도…日내 자성론 높아져
일본에서 '혐한(嫌韓)'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992년이지만 임진왜란에서부터 19세기 중반 메이지(明治)유신기의 정한론(征韓論), 1923년 간토(關東)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이르기까지 그 뿌리는 매우 깊다. 일본이 역사의 가해자임에도 지금 일본 내 혐한 여론은 날로 고조되고 있다. 일본의 극우세력은 왜 인류의 보편가치에 반하는 혐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걸까. 한ㆍ일 갈등은 치유될 수 없는 걸까. 일본 심장 도쿄 중심부의 헤이트 스피치 현장에서 혐한과 혐한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직접 들어봤다.
[도쿄(일본) =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조선총연합회(조총련)를 일본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9월26일 저녁 7시30분 도쿄 신주쿠역 동쪽 출구 공원 앞. 검은 옷차림의 한 남성이 깃발과 확성기를 들고 경찰의 호위 아래 가두연설에 여념이 없다. 자신을 반(反)글로벌리즘 국제보수연합 대표로 소개한 엔도 슈이치(遠藤修一)다. 그는 일본 우익에서도 꾸준하고 집요한 가두연설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수년째 매월 1~2회 신주쿠역 공원에서 헤이트 스피치를 하고 있다.
현재 일본 내 혐한 시위는 크게 두 종류로 진행되고 있다. 하나는 개인이 확성기를 들고 나서는 헤이트 스피치고 다른 하나는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ㆍ일본의 대표적 극우단체)' 중심의 혐한 단체들이 주도하는 '헤이트 시위'다. 겉으로는 외국인 반대 의사를 표출하는 운동이라지만 사실 일본에서 헤이트 스피치ㆍ시위는 혐한 시위와 동의어다. 정례화한 엔도의 헤이트 스피치는 규모가 작지만 혐한 시위자 외에도 반대 목소리를 내는 다른 참가자들까지 끌어 모아 늘 혐한과 반혐한 간 대결의 장이 되고 있다.
헤이트 스피치는 혐한 시위의 동의어
당초 엔도의 헤이트 스피치는 주로 한국과 한국인을 공격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2016년 5월 일본 참의원에서 헤이트 시위 억제법이 통과되자 공격 대상은 교묘히 조총련으로 옮겨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적법 아래 '숨은' 헤이트인 셈이다. 1시간으로 예고된 시위 내내 엔도는 "일본에서 조총련을 몰아내야 한다", "조총련을 해체해야 한다"고 반복해 외쳤다. 이날 현장에는 약 20명의 혐한 시위 반대 시위자가 참석해 엔도의 연설을 방해했다. 특정 단체 소속이 아니라 개인 신분으로 트위터에서 헤이트 스피치 일정을 확인하고 모인 이들이다.
이들은 "카에레(かえるㆍ꺼져라)"라고 외치며 엔도를 견제했다. 한국어ㆍ영어ㆍ일본어로 된 '외국인 차별금지' 팻말을 들고 확성기 사이렌까지 울리며 엔도 주변에 몰려들었다. 규모로만 놓고 보면 엔도를 압도할 정도였다. 엔도를 엄호하는 경찰과 혐한 시위 반대 시위자들의 방해가 더해져 엔도의 헤이트 스피치 내용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한국 직접 공격 어려워지자 조총련 공격
현장에서 만난 카운터 시위대 중 한 명인 60대 남성 미야타키 씨는 “엔도가 주장하는 ‘조총련해체’는 결국 코리안에 대한 공격”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엔도는 원래 ‘코리아(한국과 북한을 통칭)는 일본에서 나가라’고 주장했다가 (헤이트 시위 억제법 통과 이후) 한국을 직접 언급하기 곤란해지자 조총련으로 대상을 바꿔 계속 공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제의 한반도 강점, 위안부, 강제징용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이 없었음을 지적하는 시각도 현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미야타키 씨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조선을 침략해 식민지로 만들고도 그에 대해 책임지지 않았다"며 "위안부와 징용공 문제 역시 정부나 정치가가 해결하고 싶어하지 않으니 매스컴에서 조선과 한국 사람들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며 분개하기도 했다.
1년 6개월째 엔도의 헤이트 스피치에 반대하기 위해 시위하고 있다는 40대 여성 가타오카 씨는 "지금이야 엔도 혼자 스피치하고 있지만 예전엔 동료들과 함께 나와 '조선인은 돌아가라', '조선인은 죽어버려라'는 둥 험한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며 "세가 줄자 이제 헤이트 스피치가 아닌 정치적 주장이라고 변명하지만 본질은 같다"고 설명했다.
*재특회(在特會) :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在日特權を許さない市民の會)의 줄임말로 재일 동포에게 주어지는 특별 영주 자격이 특권이므로 박탈하자는 주장을 펼치는 극우 민족주의 단체. 일본 내 혐한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
*조총련(朝總聯) :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在日本朝鮮人總聯合會)의 줄임말로 재일 조선인 중 좌익 계열에서 설립한 단체. 대한민국이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조국으로 규정한다.
혐한 시위에 대한 자성 여론 높아
일본 언론의 보도 태도에 대한 비판론도 나왔다. 가타오카씨는 기자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조국 법무부장관을 언급하며 최근 일본 매스컴의 보도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그는 “요즘 일본 TV에서 한국의 조국 법무부장관의 거취문제를 둘러싼 보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며 “일본에야말로 탄핵돼야 할 각료들이 잔뜩 있는데 한국 관련 보도를 자국민 눈가리개로 악용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들은 인터뷰 말미에 기자가 이름과 나이를 묻자 선뜻 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다 성과 연령대만 알려줬다. 우익의 보복이 두려워서일까. 현장에서 마스크를 쓴 혐한 시위 반대 시위자들도 눈에 띄었다. 정례화한 헤이트 시위 현장에서 평상복 차림의 정체 모를 이들이 돌아다니며 혐한 시위 반대 시위자들을 카메라로 채증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이렇듯 어수선한 헤이트 스피치 현장은 '보이지 않는 감시' 속에 통제되고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혐한 시위 반대 시위자는 기자가 현장에 왜 나왔느냐고 묻자 "자신이 일본을 사랑하는 만큼 타인의 애국심도 존중해야 하는데 저들은 애국심이라는 이름 아래 한국과 조총련만 표적으로 삼는다"면서 "이게 폭력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되물었다.
헤이트 스피치와 혐한 시위가 격화하거나 변질을 거듭하자 일본 우익 내에서 자성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일본 신우익단체 잇스이카이의 스즈키 쿠니오 최고고문은 저서 '나는 왜 혐한 시위를 싫어하는가'에서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지금 헤이트 스피치를 하는 사람은 우연히 일본에서 태어났을 뿐이다. 일본인이 무엇인지 모르는데도 '한국인은 나가라'고 말한다. 그건 지나친 자만이다."
아베 신조 정권의 묵인 아래 일본 내 혐한 정서는 이제 매스미디어의 반복적인 보도, 조직적인 시위, 헤이트 스피치 등으로 표출되며 하나의 사회현상이 됐다. 하지만 이를 둘러싼 반대여론과 더불어 시민들의 자정 노력 역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재특회원에서 혐한 시위 반대 카운터로 전향한 전직 야쿠자 주도의 행동주의 조직이 혐한 시위대를 제압하며 헤이트 시위 억제법의 촉매제 역할을 한 사건도 있었다. 이들은 일본 사회의 건강성 회복에 대한 한 가닥 희망일 수 있을까.
오는 13일과 20일 도쿄도 무사시노시 키치죠지에서 대규모 혐한시위가 예고돼 있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카운터 시위대는 헤이트 시위에 맞서 국제사회와 일본 정부의 부당성을 다시 알리겠다고 다짐한 뒤 해산했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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