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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무릎베개/이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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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탄식합니다 귀에는 세상 것들이 가득하여 구르는 홍방울새 소리 못 듣겠네 고백합니다만, 저 역시 그런 귀를 갖고 있지요 부끄러움이 차고 넘칠 때 찾아가는 기묘한 가게를 소개합니다 책을 펼쳐 수소문해야 열리는 귀 파 주는 가게, 똑똑 노크하고 들어서니 가만히 반겨 주는 그녀가 있네요 말없이 내어주는 무릎을 베고 누워 봅니다 세상 것들이 가득한 귀를 맡겨 보아요 귀, 당신이 아니면 함부로 맡길 수도 없는 마음과 닮지 않았습니까 급소를 내놓는 일이 평화로 바뀌는 건 순간이군요 무릎의 시간 사이, 차가운 귀이개에 깜짝 놀라던 추운 날들을 잠시 잊어도 좋습니다 나무의 살을 깎아 만든 귀이개에서 나이테의 속삭임이 착각처럼 들려오네요 책상 서랍 깊숙이 숨겨 놓았던 기억도 그녀의 손길 아래서는 속수무책, 기억 뭉치들 또르르…… 귀이개에 달린 새하얀 솜털들이 부끄러운 잔해를 솔솔 털어 줍니다 금세라도 들릴 듯, 아니 들릴 듯 홍방울새 소리 그러나 그녀의 마무리는 언제나 호- 하고 숨결을 불어넣는 일, 이 무릎 아래라면 고요한 죽음도 처음 깨어난 듯한 잠도 가능할 것만 같아요 오래전 먼지였을 태아마저도 가는 숨소리를 내게 만드는 솜씨, 무릎에 귀를 묻다 고백합니다만, 이럴 때 우리는 탄식해도 좋겠습니다 자지러지는 저 홍방울새 소리 나는 더 못 듣겠네



[오후 한 詩]무릎베개/이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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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려한 시다. 이 시의 앞과 뒤에 적힌 "귀에는 세상 것들이 가득하여 구르는 홍방울새 소리 못 듣겠네"와 "자지러지는 저 홍방울새 소리 나는 더 못 듣겠네"는 이성복 시인이 쓴 ?귀에는 세상 것들이?라는 시에서 옮겨 온 문장들이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정말이지 기가 막히게 배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무의 살을 깎아 만든 귀이개"로 "세상 것들이 가득한 귀"를 "솔솔" 파 주는 '그녀'의 "무릎 아래라면 고요한 죽음도 처음 깨어난 듯한 잠도 가능할 것만 같"다. 그런데 바로 그럴 때 "자지러지는 저 홍방울새 소리"라니. 이 소리의 정체를 나는 지금도 전혀 알지 못하지만, 그리고 대체 내가 왜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뒤늦게 나도 모르게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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