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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42] 파리의 택시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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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42] 파리의 택시 안에서 윤재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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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쇼팽. 그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비 내리는 파리 시내를 어슬렁거리다가 서서히 내려오는 밤의 장막 앞에서 문득 길을 잃습니다. 숙소까지 택시를 타기로 합니다. 로마 택시가 흰색인 것과는 반대로, 파리 택시는 검은 색 일색이네요. 검은 택시의 문을 열고 검은 시트에 앉는데 기사 역시 새카만 밤의 색입니다. 완벽한 블랙! 충격적인 검정이 저리도 아름답습니다. 밤의 입구에서, 저는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검은 제복 속의 흰 와이셔츠 때문에 심연의 우주처럼 더욱 심오한 얼굴. 두 눈의 흰 자위가 보석처럼 빛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 보면 로미오가 줄리엣의 모습에 반해 중얼거리는 대목이 나오지요. “저 여인은 에티오피아 여인의 귀에 걸린 보석처럼 밤의 뺨에 걸려 있는 것 같구나!” 와이셔츠 깃과 두 눈동자만 희게 빛나는 칠흑의 사람이 저를 돌아봅니다. 검은 택시 안의 눈부신 흰 빛. ‘밤의 뺨에 걸린 보석’이라는 셰익스피어의 표현이 실감납니다.


청년과 중년 사이쯤 되어 보이는 나이. 이 사람은 아마도 알제리나 튀니지 출신일 테지요. 사막의 강렬한 햇살을 핏줄 속에 넣은 채 가난의 허들을 뛰어넘으려는 표범. 아니면 북아프리카 해변에서 지중해를 가로질러 유럽으로 건너 온 범고래 같은 느낌입니다. 완벽한 검은 색과 완벽한 흰 색이 아름답게 분할된 고래 말입니다. 얼굴에 은은히 흐르는 검은 기름기. 치명적으로 희고 가지런한 명모호치(明眸皓齒)의 이빨. 수백 수천 세대의 아프리카 토속 유전자를 그대로 지닌 순종 아프리카인이 제 앞에 숨 막히게 앉아 있습니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먼트에 흐느끼는 불빛’. 정지용 시의 가락들이 밤비처럼 내리는데 달리는 택시 안에는 쇼팽의 '녹턴'이 흐릅니다.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의 율동 속에 밀려왔다 밀려가는 감정의 파도. 흰 이빨 살짝 드러내며 미소를 지을 때면, 그는 검은 빛과 흰 빛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인간 피아노가 됩니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이 택시 안의 쇼팽으로 환생한 듯하군요. 저는 그가 ‘충격적인 검정’이 아니라 ‘인문정신이 충만한 음악 애호가’임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검은 쇼팽. 당신은 쇼팽의 영혼과 함께 사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


그의 영혼은 소박하게 빛납니다. 쇼팽 음악의 목표가 소박함인 것처럼, 흰 색과 검은 색만으로도 자기 삶의 역사를 드러냅니다.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무수한 음을 연주해야만 비로소 소박함이 눈부신 빛을 얻게 된다.’고 쇼팽은 말했습니다. 선조들의 간난신고를 건너 그가 도달한 곳. 여기 택시 안에서 빛나는 흑백 건반의 마법. 인간정신 최후의 맑고 쓸쓸한 소박함!


[윤재웅의 행인일기 42] 파리의 택시 안에서

“나는 쇼팽을 좋아해요(I like Chopin).” “당신은 피아니스트?” “아니요. 쇼팽을 좋아하는 여행객입니다.” “당신은 'I like Chopin'이란 곡도 좋아하나요?” 예기치 않은 질문이 아득한 20대 시절로 저를 인도합니다. 전자기타 선율이 아름답게 흐르는 서정적인 유로팝. 오늘처럼 비 오는 날 어울리는 곡이지요. 검은 쇼팽은 제 반응을 살핍니다. 가물가물 떠오르는 가사. "비 오는 날엔 안녕이라고 말하지 말아요. 당신과 함께 하고 싶어요. (…) 난 쇼팽이 좋다고 말하곤 했죠. 가끔씩 날 사랑해주세요." 연주 시간이 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곡도 좋지만 지금 나오는 '빗방울 전주곡'이 더 좋아요."


택시는 비 오는 파리 시내를 '빗방울 전주곡' 연주하듯 달립니다. 피아노의 철학자로 불리는 러셀 셔먼. 시보다 더 시적인 문장들이 출렁이는 그의 '피아노 이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지요. "피아노의 한 옥타브 안에는 흰 건 반 일곱 개와 검은 건반 다섯 개가 있다. 흰 건반은 수도 더 많고 손과 눈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식별하기도, 연주하기도 더 힘들다. 검은 건반은 거품 같은 흰 건반의 바다 위로 솟아오른 빙하와 같다. 이 위에 내려앉는 것이 훨씬 더 쉽다."


비유가 오묘합니다. 흰 건반의 바다는 늙은 유럽, 검은 건반의 빙하는 젊은 아프리카 아닐까요? 저는 검은 건반에서 '아프리카의 생명'을 느낍니다. '나는 죽지 않는다. 죽지 않으리. 영원한 정신생명으로 살아가리.'라고 외치는 내 마음의 주인공일 테지요. 바다의 흰 거품 위에 솟아오른 검은 빙하! 행인이여, 그대 고해(苦海)의 바다엔 무엇이 거품이고 무엇이 빙하입니까?


우리가 이 바다 위에 내려앉아야 할 곳을 부처님은 '섬'이라고 불렀습니다.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으며, 법(dhamma)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라." 섬. 생명이 안착하는 곳. 고대 인도어 '섬[dipa]'은 등불과 음이 같아 중국인들은 '등불'로 번역했지요. 그래서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이 된 겁니다. 여든 살 부처님 열반 직전 종례의 말씀. 생의 어두운 바다에서 허우적거리지 말라는 간곡한 당부의 말씀. 파리의 택시 안에서 헤아려 보니 이제 곧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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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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