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경제 윤신원 기자] 한국사회에 ‘미투(#MeToo·나도 당했다)’ 흐름이 시들해지고 있는 가운데 비록 폭로 내용이 사실이라도 ‘사실적시 명예훼손’ 조항을 이용한 역고소도 이어지고 있다. 때문에 피해자들이 고발이나 폭로를 주저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제도 개선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5일 서울 송파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4월 유명 콘텐츠 제작업체 내의 상습적인 갑질과 성폭력을 폭로한 김 모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수사 중이다. 폭로 당시에는 가해자로 지목된 임 모 대표가 사건을 인정하는 사과문까지 올렸지만, 추후 김씨를 ‘허위사실 유포로 인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것이다.
사건을 수사하는 송파경찰서는 김씨를 입건해 수사하고 있지만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혐의 적용을 검토하고 있다. 현재는 둘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으나 김씨가 폭로한 내용이 사실이었다고 할지라도 임씨의 명예가 훼손됐다고 한다면,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 기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올해 2월 언론계 미투에 앞장섰던 전직 기자 변 모씨도 같은 경우다.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부장급 기자가 최근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변씨를 고소했고, 경찰 수사 결과 폭로가 사실로 밝혀져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변씨는 기소될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미투운동이 다소 잠잠해지면서 성폭력이나 갑질을 폭로한 피해자들이 되레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는 일이 늘고 있다. 미투운동 촉발 직후부터 제기돼왔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형법 제307조 1항에 적시된 ‘사실적시 명예훼손’은 진실을 말했어도 상대방이 명예가 훼손을 당했다고 느꼈다면 고소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 법은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죄’에 포함된 하위 구성요건이기 때문에, 폭로의 진실 여부만 달라질 뿐 피해자가 명예훼손죄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유발한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다만 실제 명예훼손죄가 인정되는 요건은 상당히 까다롭다. 공연성과 고의성 여부가 인정돼야 하며, 형법 제310조 ‘진실한 사실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규정 상 진실한 내용이 공익적인 경우는 무죄로 인정한다. 실제로 미투운동처럼 성폭력 사건을 폭로한 때나 비리 의혹을 제기한 때 등은 모두 ‘공공의 이익’을 위한 행위로 보고 무죄로 판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이 모든 과정이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기 때문에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공공의 이익이 인정돼 무죄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피해자는 긴 시간동안 수사를 받아야 하고, 이 과정에서 또 다른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서혜진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허위가 아닌 사실을 말했어도 공익성이 인정되지 않을 때 특정인의 명예를 실추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은, 조직 내 상급자나 사회 유력 인사 등이 가해자가 되는 권력형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등이 피해 사실을 공개하려고 해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때문에 역고소를 당할 우려 등으로 인해 공개를 꺼리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피해자가 스스로 피해 사실을 드러내고 부당함을 호소하는 경우에는 명예훼손죄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위법성 조각(阻却·성립하지 않음) 사유'에 해당한다는 법규를 만들어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사실적시로 인한 명예훼손을 처벌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에도 맞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독일, 일본, 프랑스 등 일부 국가만이 처벌하고 있고, 나머지 대다수 선진국들은 매우 엄격한 조건을 적용해 공익 목적 폭로자를 보호한다. 유엔(UN)서도 ‘진실 방어’를 위해 해당 조항을 폐지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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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해당 법을 존치해야 한다는 입장도 존재한다. 일례로 사회적 소수자의 정체성에 대해 소문을 내거나, 이미 유죄 판결이 나 처벌을 받은 사실을 상대 비방의 목적으로 소문을 낸 경우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대응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해당 법의 존재가치도 충분하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국회에서는 성폭력 피해사실을 알리기 위해 공연히 사실을 적시한 경우에 대해서는 명예훼손죄를 적용하지 않도록 하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하지만 피해자에 대한 개념, 가해자로 정의되는 시점 등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일면서 국회에 계류돼 있다.
윤신원 기자 i_dentit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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