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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골목길] 윤동주, 박노수 발길잡은 ‘藝의 고장’ 서촌 옥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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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리 잦아들듯 다시 볼 수 없는 그들의 흔적을 머금고 제자리 우뚝 지키고 선 서촌의 풍경

[한국의 골목길] 윤동주, 박노수 발길잡은 ‘藝의 고장’ 서촌 옥인길 인왕산 아래로 흐르던 물길 위엔 빼곡히 들어선 아파트와 주택이 즐비하지만, 여전히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공간이 있어 과거 예인들이 앞다퉈 찬사를 보낸 인왕산의 아름다움을 오늘까지도 짐작케 합니다.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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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겸재 정선의 대표작이자 국보로 지정된 ‘인왕제색도’ 속 풍경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경복궁 서쪽에 위치한 마을, 서촌 수성동(水聲洞) 계곡인데요. 아름다운 풍광과 더불어 물소리가 유명하다는 이름답게 오랜 시간 동안 예인들의 눈과 귀, 그리고 마음에 담겨 수많은 작품으로 세상에 그 존재를 알린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김광규 시인의 표현대로 ‘한때 그 가슴에 호랑이를 기른’ 인왕산을 겸재 정선과 같은 시선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된 지는 불과 7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971년 세워진 옥인동 시범아파트가 계곡 위를 지키고 서 있었기 때문이죠. 서울 도심 곳곳에 시범아파트가 들어서던 시기, 이곳은 산 좋고 물 좋은 동네에 세워진 아파트로 그 명성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아파트 노후화와 더불어 인왕산 경관을 훼손 문제가 불거졌고, 2008년 철거가 시작돼 2012년에야 비로소 제 모습을 찾게 됐다고 하네요.

인왕산을 올려다 보는 서촌 옥인길은 골목마다 남아있는 예술가들의 흔적을 따라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시인 윤동주, 소설가 김송 등 문인은 물론 추사 김정희, 겸재 정선, 남정 박노수, 청전 이상범과 최근의 천경자 화백까지 예인들의 체취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한국의 골목길] 윤동주, 박노수 발길잡은 ‘藝의 고장’ 서촌 옥인길 인왕산을 가로막고 있던 옥인 시범아파트가 철거되면서 탁 트인 풍광을 통해 겸재 정선의 화폭 속 풍경을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사진 = 천지민 PD


수성동 계곡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빨간 벽돌담 너머 이층집이 보이는데, 이곳은 시인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재학 당시 지냈던 하숙집이 있던 자리입니다.
“십자가가 허락된다면/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어두워가는 하늘 밑에/조용히 흘리겠습니다”
그의 시 ‘십자가’가 쓰여진 1941년 5월 31일은 그가 이곳에 묵던 시기입니다. 중국 길림성 명동촌을 떠나 서울에 온 그는 처음엔 학교 기숙사에 머물렀는데, 태평양전쟁 여파로 기숙사 식당운영에 차질이 생겨 하숙집을 찾던 중 항일 소설가 김송의 누상동 집에 하숙생으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가 아침 식사 전 뒷산인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하러 다녀오고, 저녁 식사 후엔 김송과 대청마루에 앉아 문학과 세상 이야기를 나눴다던 공간은 이제 온데간데없고 이층집만 덩그러니 남아있지만, 이곳은 중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순국한 윤동주가 서울에 남긴 유이한 흔적 중 하나입니다.


[한국의 골목길] 윤동주, 박노수 발길잡은 ‘藝의 고장’ 서촌 옥인길 일제강점기 위세를 떨쳤던 친일파 윤덕영이 딸을 위해 지은 집은 후에 한국화의 대가 박노수 선생의 집이 되어 지금은 그의 작품세계와 생활상을 전시한 미술관으로 탈바꿈했다. 사진 = 천지민 PD


인왕산을 뒤로하고 통인시장 방향으로 조금 걸어 내려오면 고풍스러운 2층 양옥집이 골목 사이로 지붕을 빼꼼 내밀고 있는데, 채색문인화로 이름을 널리 알린 남정 박노수의 집인 이곳은 그의 사후 작품과 함께 종로구에 기증, 미술관으로 탈바꿈해 일반에 공개됐습니다. 본래 이 일대는 조선후기 화원 김홍도가 지기들과 어울려 시 읊는 모임을 가진 ‘송석원’이 있던 자리였고, 암석 위에 새겨진 추사 김정희의 송석원(松石園) 글씨는 당대 화사들의 작품 속에도 선명히 남아있죠. 이후 송석원은 친일파 윤덕영의 소유가 됐고, 그는 이 일대에 벽수산장이라 불린 프랑스 양식의 대저택과 14동 한옥을 짓고 말 타고 거드름 피우며 동네를 누볐다고 전하는데, 당시 이 대단한 대저택을 두고 사람들은 “집 한 채를 14, 5년이나 두고 건축하고도 오히려 필역(畢役)치 못하였다 하면 누구나 경이의 눈을 뜰 것이다”(조선일보 1926.5.31) 고 꼬집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다 헐려 쪼개지고 없어진 대저택의 난간석과 문기둥만이 골목 곳곳에 남아 과거의 영화를 쓸쓸히 간직한 가운데, 박노수 가옥은 윤덕영이 딸을 위해 특별히 세운 건물로 벽수산장 대지에 있던 건물 중 그 자리에 유일하게 형태가 온전히 보존돼 지금은 남정의 작품세계, 그리고 그가 수집한 각별한 수석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났습니다.



[한국의 골목길] 윤동주, 박노수 발길잡은 ‘藝의 고장’ 서촌 옥인길 청전 이상범이 직접 만들었다는 꽃담은 절반이 소실된 채 남아있는데,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소실된 것을 전쟁 후 집에 돌아온 그가 그대로 두고 지냈다고 한다. 사진 = 천지민 PD


18세 소년 박노수가 그림에 뜻을 품고 상경해 찾았던 서촌에서의 자취를 쫓아 걷다 보면 어느새 그의 스승 청전 이상범의 집에 닿게 됩니다. 청초하고도 고아한 수묵담채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그이지만, 사실 우리에겐 그의 작품보다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이 더 깊이 각인돼있죠. 1936년 조선 청년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 이상범은 동아일보 미술기자로 기사에 실을 사진 속 그의 가슴에 걸린 일장기를 하얗게 지워 암울했던 식민 조선을 살아낸 동포들에게 희망을 선사했습니다. 그의 집 마당엔 그가 직접 만든 꽃담이 시선을 사로잡지만 이내 절반 가까이 파손된 까닭이 궁금해집니다. 골목 어귀에 앉아계신 어르신께 여쭤보니 “전쟁 통에 폭격 맞아 깨졌지”라고 답하시네요. 고개를 돌려 바라본 처마 밑 ‘樓下洞天(누하동천)’ 편액은 인왕산 밑 고즈넉한 이 동리를 절경으로, 그 자신을 신선으로 생각하고 붓을 들었을 청전의 마음가짐을 짐작케 합니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바로 맞은편엔 환상적 세계관을 짙은 채색으로 펼쳐낸 화가 천경자의 집이 숨어있습니다. 1991년 작가로서 지옥과도 같았던 위작 시비에 휘말려 절필을 선언하고, 이내 복귀해 첫 회고전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창작열을 불태웠던 그녀가 건강 악화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 그녀의 기쁨과 슬픔이 녹아들었을 공간은 골목 사이에 숨은 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인왕산을 등지고 서 있습니다.


[한국의 골목길] 윤동주, 박노수 발길잡은 ‘藝의 고장’ 서촌 옥인길 백사 이항복의 집이 있던 필운대 일대는 조선시대 화훼단지로 아름다운 꽃나무들이 가득해 꽃놀이 명소로 손꼽히는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건물에 가려 옛 절경 대신 글씨로만 과거의 영화를 짐작해볼 뿐이다. 사진 = 천지민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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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예인들 중 유독 화사들의 이름이 서촌 골목골목마다 아로새겨진 까닭은, 필경 남다른 풍광의 아름다움이 곳곳에 숨어있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골목 사이로 조그맣게 난 쪽문을 열고 들어가면 배화여중·고 건물을 만날 수 있는데, 이곳 생활관 건물 뒤편엔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암벽이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지금은 자취조차 찾을 수 없지만, 조선시대 이곳 일대는 도성의 꽃시장을 책임지는 대규모 화초 재배 지역이었다고 전하는데요. 그 까닭에 형형색색 꽃나무가 만발할 때쯤이면 꽃구경 온 한양사람들이 허리춤에 술병 차고 필운대에 들어앉아 시 한 수 읊는 풍경은 예사요, 이 풍경까지 소재로 한 작품이 여럿 남아있을 정도입니다. 본래 권율 장군 집이었던 이곳은 그가 사위인 이항복과 딸에게 집을 내주며 이항복의 호 ‘필운’을 따 필운대라 불렸다고 합니다. 번다했던 상춘객 행렬 사이로 선명히 빛났을 ‘필운대’ 글씨는 이항복의 글씨라고도, 그 9대손인 이유원의 글씨라고도 하지만 과거의 영화가 무색하게 지금은 큰 건물의 그늘에 가려 잡초만 무성한 폐지(廢址)가 되어 세월의 무상함만 깨닫게 합니다.


예술가들의 발길을 끌어모은 걸로도 모자라 그들을 주저앉히고 모여 살게 한 인왕산의 기운은 어쩌면 그들의 눈과 귀, 손과 마음을 휘감고선 무수한 작품으로 분해 세상 구경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이제는 사라진 옛 서촌의 편린, 그 조각을 골목 사이사이에서 꺼내 들여다보면 눈부셨던 동리의 아름다움을 조각으로 유추해야 함이 못내 아쉽고, 그럼에도 그 공간 사이에 터를 잡고 자신의 예술을 시작하는 동시대 작가들의 도전은 꽃피고 있어 가히 예술인의 마을이란 명성이 허명이 아님을 지금, 이 순간에도 서촌은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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