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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1]살리나 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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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1]살리나 섬에서 윤재웅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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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산만야가 연일 쩔쩔 끓습니다. 염천폭염. 밤잠은 잘 주무시는지요. 선조들은 이런 더위를 어떻게 이겨내셨을까요? 세종 때의 문인 맹사성이 지은 <강호사시가>에는 '탁료계변에 금린어 안주로다'라는 구절이 보입니다. 시냇가에 발 담그고 앉아 싱싱한 물고기 안주로 막걸리 마시는 풍류입니다. 물론 '봄노래'의 일부지만 시냇가에 발 담그는 건 이즈음이 제격입니다. 해남 두륜산 대흥사 입구 피안교 다리 아래 계곡 평상이 그리워집니다. 푹푹 찌는 삶에…, 반복되는 일상에…, 정말이지 이젠 휴가가 필요합니다. 휴가다운 휴가. 어디든 길 떠나서 새로운 자기를 만나는 그런 휴가 말입니다. 도움이 된다면 나라 밖을 떠돌다 온 제 이야기를 조금 들려드리려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의 두 줄짜리 시 <섬>입니다. '가고 싶은 그 섬'은 휴가가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유토피아일지도 모릅니다. 제게도 가고 싶은 섬이 꼭 하나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시원하고 선선한 곳. 우체부의 자전거 바큇살 사이로 햇빛과 바람이 쏟아져 흐르는 곳.

살리나 섬. 입술과 혀를 시냇물처럼 소살거려 불러보면 시원하고 예쁜 이름입니다. 시옷과 리을이 내 몸을 감싸고돕니다. 지중해 푸른 바다. 그 바다 뺨 위에 보석처럼 돋아 있습니다. 이탈리아 남단 시칠리아 섬 북쪽 해안 저 멀리 점점이 흩어져 있는 에올리안 제도(諸島). 밀라초에서 배를 타고 불카노 섬과 리파리 섬을 지나 도착하는 곳이 살리나 섬 산타 마리나 선착장입니다. 여기서 다시 섬의 북서쪽 끝 폴라라 마을까지 육로로 가야 합니다. 시와 바다와 자전거가 있는 영화! <일포스티노>(1994) 촬영 현장.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정치적 박해를 피해 이탈리아의 외딴 섬으로 망명을 합니다. 세계 각지에서 독자들이 편지를 보내옵니다. 시인이 머물고 있는 마을은 너무 작아서 우체부도 없습니다. 순박한 노총각이자 가난한 어부의 아들인 마리오는 네루다의 전속 우체부가 되어 편지를 전달하면서 자연스럽게 시를 배우게 됩니다. 그는 시를 통해 마을의 아름다운 처녀 베아트리체 루소의 마음을 얻게 되고 마침내 결혼도 합니다. 네루다는 박해가 풀리어 조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마리오는 군중대회에 나가 네루다에게 헌정하는 시를 발표하려다 현장에서 불행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윤재웅의 행인일기 1]살리나 섬에서


간략한 줄거리는 이렇지만 영화가 주는 감동은 디테일의 힘에 있습니다. 아름다운 풍광, 서정적인 배경음악, 시에 대한 쉽고 진지한 설명…. 평소의 시 이해와 확연히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죠. 시의 진정한 주인은 시인이 아니라 그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대담한 발상 전환, 아름다움의 발견은 시인들만의 몫이 아니라 그것을 발견하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라는 깨우침이 몸 안에 녹아듭니다. 마리오에게 들려주는 네루다의 황홀한 해변 시낭송은 또 어떤가요. 시가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영혼을 울리는 노래라는 체험을 뼛속 깊이 하게 됩니다. 시가, 예술이, 금린어처럼 싱싱하게 밀려옵니다.


오래도록 시를 좋아하고 시에 대한 글을 쓰고 가르치기도 하지만 제 시 사랑 이력은 이 영화 한 편이 주는 감동의 무게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시 교과서 100권 읽는 것보다 낫습니다. 시는 왜 배우는가? 시를 좋아하고 사랑하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가난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시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되는 주인공을 바라보면서 '쓸데없는 혀놀림' 탓으로 돌린다면 그대는 이미 하늘과 바다와 별빛을 잃어버린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가난한 어부의 아들은 어느새 평범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해서 관객들의 가슴에 편지를 전해주는 우체부로 변합니다. 절벽 위의 바람 소리, 바다의 파도 소리, 성당의 종소리, 별빛이 내는 소리, 아내의 뱃속에 있는 아기 심장 뛰는 소리가 우리들과 함께하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임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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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언덕에서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은 마시모 트로이시 길입니다. 마시모 트로이시는 우체부 역할을 맡은 배우 이름입니다. 길 표지판 옆 폐허의 잡초밭 사이로 더듬어 올라가면 네루다 시인의 집이 있습니다. 울다 지친 매미껍질처럼 텅 빈 마당. 제 몸 걸어 잠근 문. 영화 촬영 현장임을 알리는 신문 기사와 사진이 잠긴 문에 쓸쓸하게 붙어 있습니다. 시인이 시를 쓰던 자리, 아내와 함께 춤추던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바다를 바라보던 시인의 뒷모습. 영화 속의 그 공간에 부겐베리야 붉은 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하늘은 크고 바다는 시원합니다. 꽃나무 그늘에 산들바람 붑니다. 산들바람은 우체부입니다. 저는 문득 사람과 사람 '사이'에 와 있음을 느낍니다. 사람만이 제일이 아닌 곳. 사람 중심 생각을 잠시 내려놓는 곳. 하늘과 바다가, 지나온 시간들과 지금 이 순간이 하나가 됩니다. 잠 못 드는 그대의 열대야 길 위에도 '사이'의 사랑과 평화와 아름다움이 쉬르릉 휘르릉 은빛 바큇살처럼 새로 흘러가기를 기원합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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