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윤제림의 행인일기 87]목련꽃 그늘 아래서

시계아이콘01분 57초 소요

[윤제림의 행인일기 87]목련꽃 그늘 아래서 윤제림 시인
AD

본가(本家)에 들렀다가, 거기까지 갔습니다. 제 모교가 있던 자리입니다. '자리'라고 말하기도 쑥스럽습니다. 내력을 적은 표지판 하나 없고, 옛 절터만큼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은 까닭입니다. 학교가 떠난 자리엔 아파트가 들어앉았고, 주변 풍광도 낯설기 짝이 없었습니다. 교문 옆 오래된 성당이 남아있을 뿐이더군요.


공연히 짠해져서 죄 없는 아파트만 원망스럽게 올려다보았습니다.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말 걸 그랬나?' 후회도 따라붙었습니다. 동서남북만 겨우 짚어보고 돌아섰습니다. '여기쯤 목조건물, 본관이 있었다. 저쪽으로 중학교 건물이 있었다. 운동장 서쪽 끝엔 옹벽이 있었고, 그 위로 위태롭고 무질서한 집들이 올려다보였다.'

환하게 피어난 목련꽃이, 저를 열일곱 살의 봄날로 데려다주었습니다. 피아노 반주를 타고 오는 '사월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목련은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노래가 자랑스러울 것입니다. 바람도 없는데 꽃잎이 살랑거립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노라…." 봄이 지금보다 훨씬 길게 느껴지던 시절이었습니다.


환청과 환각에 취해서 언덕길을 내려왔습니다. 음악선생님 생각이 났습니다. 교가를 배우던 날의 음악실 풍경도 어제처럼 생생했습니다. 돌이켜보니, 훈련소에서 군가를 배우던 느낌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실제로, 군가도 여러 곡 지으셨지요. 아이처럼 천진하고, 음악가답게 나이브한 감성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유머가 풍부하고 장난과 놀이를 좋아하셨지요. 항상 유쾌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좀 달라보였습니다. 근엄한 표정으로 말씀하셨지요. "여러분의 교가는 예사로운 노래가 아닙니다. '보리밭'의 작곡가가 만든 곡입니다. 이 분 노래들 중에는 명곡 아닌 것이 없어요. 우리 교가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분이 누구신가? 아는 사람!"


[윤제림의 행인일기 87]목련꽃 그늘 아래서

저희들은 옆 사람 얼굴만 쳐다보았습니다. 결국 당신께서 답하셨습니다. "윤용하(尹龍河)선생이십니다. 어려운 삶 속에서도, 투지와 용기를 잃지 않았던 분이지요. 옳다고 믿는 것은 끝까지 지켜냈고, 그렇지 않은 것들과는 일체 타협을 하지 않았습니다. 동요처럼 순수하고, 가곡처럼 아름다운 영혼을 지녔던 음악가입니다."


저는 지금 제 방에 앉아서 '보리밭'을 듣고 있습니다. 이 노래의 모든 버전을 찾아보겠다는 생각으로, 성악가들을 불러내오고 있습니다. LP판과 카세트테이프까지 뒤지고 있습니다. 조수미, 김영자, 신영조, 안형일, 엄정행…. 제 고향 휴게소가 온종일 '울고 넘는 박달재'를 틀어대듯이, 저는 밤새 '보리밭'을 들어보려는 것입니다.


잘 알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화나는 일입니다. 한참 속상해하다가 겨우 기억해냈습니다. 조영호(曺映鎬). 고등학교 은사 한 분께서 엄지를 추켜세우시던 성악가입니다. "보리밭은 그 사람이 최고지. 듣고 있으면 눈물이 나지. 폐부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소리가, 푸른 보리밭에 붉게 타는 노을을 보여주거든."


동감입니다. 같은 노래인데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싶습니다. 성악에도 '명기(名器)'가 있음을 실감합니다. 보리에 관한 명시들도 연달아 떠오릅니다. 청보리를 '어머니 무명 옷고름 속의 눈물 같다'던 시인(임홍재)도 있었지요. 그에 시에 대한 찬사(저항적 순수의 시)를 보리밭에도 바치고 싶어집니다.


'함형수' 시인의 육성도 들립니다. 빼어난 시 '해바라기의 비명(碑銘)'에 관한 기자회견 같습니다. 비석을 세우지 말고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는 유언.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는 부탁. '푸른 보리밭 사이로' 노고지리가 되어 날아오르겠다는 외침.


빈센트 반 고호의 '밀밭 풍경'이 겹쳐집니다. 그가 한국인이었다면, 보리밭을 그리지 않았을까요. 이맘때면, 전라도 고창 어느 농장 근처에 내려가 지낼 것입니다. '한하운'의 '보리피리' 가락으로 출렁대는 보리밭머리에서 붓을 들고 앉았겠지요. 푸른 보리밭을 물들일 장엄한 저녁노을을 기다릴 것입니다.


가곡 '보리밭'은 원래 '옛 생각'이란 제목의 시였습니다. 곡을 붙이는 과정에서 작곡가가 그렇게 바꿔 적었지요. 그런데, 그 일조차 범상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보리밭의 노랫말은 애당초, 윤용하를 위해 지어졌을 것만 같습니다. '박화목' 시인의 다음과 같은 회고가 그런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


"…지쳐있는 우리 맘속에, '니힐'과 애수가 저녁놀처럼 승화되어 곱게 번져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보리밭'을 통해…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문을 향한 통로일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싶은 것이다…." 저는 '보리밭'을 '고호' 만큼 불행했던 예술가 윤용하를 위한 묘비명으로 읽고 싶습니다.


AD

제 음악선생님은 못마땅해 하셨지만, '보리밭'을 국민가곡으로 만든 대중가수의 이름도 고맙게 기억합니다. 보리밭 생각이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창밖에는 목련꽃이 등불처럼 환합니다.   


시인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놓칠 수 없는 이슈 픽

  • 25.12.0607:30
    한국인 참전자 사망 확인된 '국제의용군'…어떤 조직일까
    한국인 참전자 사망 확인된 '국제의용군'…어떤 조직일까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연출 : 이미리 PD■ 출연 : 이현우 기자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했다가 사망한 한국인의 장례식이 최근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열린 가운데, 우리 정부도 해당 사실을 공식 확인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매체 등에서 우크라이나 측 국제의용군에 참여한 한국인이 존재하고 사망자도 발생했다는 보도가 그간 이어져 왔지만, 정부가 이를 공식적으로 확

  • 25.12.0513:09
    김용태 "이대로라면 지방선거 못 치러, 서울·부산도 어려워"
    김용태 "이대로라면 지방선거 못 치러, 서울·부산도 어려워"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박수민 PD■ 출연 : 김용태 국민의힘 의원(12월 4일) "계엄 1년, 거대 두 정당 적대적 공생하고 있어""장동혁 변화 임계점은 1월 중순. 출마자들 가만있지 않을 것""당원 게시판 논란 조사, 장동혁 대표가 철회해야""100% 국민경선으로 지방선거 후보 뽑자" 소종섭 : 김 의원님, 바쁘신데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용태 :

  • 25.12.0415:35
    강전애x김준일 "장동혁, 이대로면 대표 수명 얼마 안 남아"
    강전애x김준일 "장동혁, 이대로면 대표 수명 얼마 안 남아"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경도 PD■ 출연 : 강전애 전 국민의힘 대변인, 김준일 시사평론가(12월 3일) 소종섭 : 국민의힘에서 계엄 1년 맞이해서 메시지들이 나왔는데 국민이 보기에는 좀 헷갈릴 것 같아요. 장동혁 대표는 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고 계엄을 옹호하는 듯한 메시지를 냈습니다. 반면 송원석 원내대표는 진심으로

  • 25.12.0309:48
    조응천 "국힘 이해 안 가, 민주당 분화 중"
    조응천 "국힘 이해 안 가, 민주당 분화 중"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미리 PD■ 출연 : 조응천 전 국회의원(12월 1일) 소종섭 : 오늘은 조응천 전 국회의원 모시고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해서 솔직 토크 진행하겠습니다. 조 의원님, 바쁘신데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조응천 : 지금 기득권 양당들이 매일매일 벌이는 저 기행들을 보면 무척 힘들어요. 지켜보는 것

  • 25.11.2709:34
    윤희석 "'당원게시판' 징계하면 핵버튼 누른 것"
    윤희석 "'당원게시판' 징계하면 핵버튼 누른 것"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경도 PD■ 출연 : 윤희석 전 국민의힘 대변인(11월 24일)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에 출연한 윤희석 전 국민의힘 대변인은 "장동혁 대표의 메시지는 호소력에 한계가 분명해 변화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또한 "이대로라면 연말 연초에 내부에서 장 대표에 대한 문제제기가 불거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동훈 전


다양한 채널에서 아시아경제를 만나보세요!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