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 연기도 잘 해요...배우 이병헌
'그것만이 내 세상' 찌질한 노장 복서...상대 킥에 쓰러지면서도 비장함
입원 앞둔 어머니 앞에서 브레이크댄스 "과하게 표현해도 감정 안 깨진다" 확신
'광해'에선 차진 욕설 통해 복선 예고...'내부자들'서도 "존 웨인" 깜짝 웃음
"시나리오 읽다 보면 아이디어 떠올라" 역설적 표현 활용한 입체적 연기 일품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불가능,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의견일 뿐이다."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남긴 명언.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속 김조하(이병헌)는 금과옥조로 삼는다. 냉장고 문에 문구를 적은 종이를 붙이고 매일 되뇐다. 나태해질 수 있는 삶에 스스로 일침을 가하며 희망을 쫓는다. 그런데 온갖 노력에도 돈벌이는 신통치 않다. 웰터급 동양챔피언까지 올라봤으나 찢어지게 가난하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체육관 홍보 전단지를 나눠주며 겨우 생계를 유지한다. 권투선수로서 자존심은 내려놓은 지는 오래. 이종격투기 선수의 연습 상대를 자처하며 옥타곤에 오른다. 적잖은 나이를 우려하는 코치들 앞에 열중쉬어 자세로 서서 알리의 명언을 차분하게 읊는다. 진지하다 못해 비장한 얼굴은 웃음을 유발한다. 흐름은 상대의 하이 킥 한 방에 보기 좋게 넉 다운되면서 유지된다. 슬픈 처지를 역설적으로 활용해 캐릭터의 깊이를 더하는 표현. 배우 이병헌(48)이 선보이는 입체적인 연기의 근원이다.
이병헌은 코미디 연기의 달인이다. 단순히 과장되고 소란스러운 표현도 자연스럽게 해낸다. 싸이(41)의 'I LUV IT' 뮤직비디오만 봐도 단번에 알 수 있다. 춤추는 싸이 앞에 등장해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더니, 느닷없이 화면 아래에서 튀어나와 어린아이처럼 웃는다. 검지를 치켜세우며 "한 번 더"라고 외친다. 이내 격정적으로 몸을 흔드는 싸이 뒤에서 유리벽 속에 갇힌 듯한 팬터마임을 하며 흥을 돋운다.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는 브레이크댄스를 춘다. 어머니 주인숙(윤여정)과 와인을 마시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서정적인 음악에 맞춰 기괴하게 움직인다. 암으로 병원 입원을 앞둔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누리는 행복. 이병헌은 "김조하가 어머니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하는 동시에 처음으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장면"이라며 "다소 과하게 표현해도 감정이 깨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어 로봇 춤을 췄다"고 했다. "리듬이나 박자 감각이 좋은 건 아니다. 중동고등학교 시절 많이 춰봤다. 수학여행 장기자랑에서 브레이크댄스로 2등을 한 적도 있다(웃음)."
촬영장에서 로봇 춤을 보던 스크립터 김지혜(36)씨는 눈물을 흘렸다. 겉으로는 흥겹지만 슬픈 감정이 역설적으로 나타나는 행위에 감정적으로 흔들린 것이다. 이병헌은 매 작품마다 이 지점을 정확하게 간파한다. 추창민 감독(52)의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년)'에서 그는 광해를 대신해 왕을 대역하는 저잣거리의 만담꾼 하선을 연기한다. 점점 왕의 대역이 아닌 하선의 목소리를 내는데, 시발점은 사월이(심은경)와의 대화다. 함부로 입을 놀려서도 들켜서도 안 되는 위험천만한 상황. 이병헌은 무심결에 나오는 욕설을 차지게 내뱉으며 하선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예고한다. "소인의 아버지는 산골 소작농이었사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관아에서 세금으로 전복을 바치라 하여." "농사꾼에게 전복이라니. 그래서." "고리를 빌려 세금을 메우다 보니 (중략) 집과 남은 땅마저 빼앗기고 아버지까지 옥살이를 하게 되었나이다." "아, 저런." "어머니와 동생은 노비로 팔리고 저는 참판 댁 몸종으로" "이런 나쁜 놈들." "혼자 남은 아버지는 결국 맞은 장이 화근이 되어 해를 넘기시지 못하시고 그만" "에이, 이런 X같은."
이병헌은 재밌는 아이디어를 직접 고안해 연기에 반영하곤 한다. 우민호 감독(47)의 '내부자들(2015년)'이 대표적이다.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던 시나리오 속 대사들을 다양하게 변형해 영화의 숨통을 틔웠다. 여전히 회자되는 "나는 저기 모히토 가서 몰디브나 한 잔 할라니까" 등이다. 우장훈 검사(조승우)와 모텔로 피신해 나누는 대화에서는 의도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를 거론한다.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복수지. 내가 원하는 게 뭘까? 내는 정의를 원한다. 대한민국 검사니까." "아이구, 검사 양반. 참말로 웃긴 데가 있구먼. 아니, 시방 지금 무슨 존 웨인이라 이거여? 정의? 대한민국에 그런 달달한 것이 남아있긴 한가." 이병헌은 "맡은 배역을 중심으로 시나리오를 읽다보면 재밌는 아이디어가 계속 떠오른다"고 했다. "배역의 디테일부터 생각하면 절대로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 없다. 배역에 젖어드는 것이 먼저다. 영화를 보다 보면 '어떻게 저런 대사를 했지?'라는 생각에 놀라움을 주는 배우들이 있다. 시나리오에 전적으로 의지한 연기가 아니다. 모두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에 빠져 있어서 세부적인 면까지 보여준 것이다. 그 점에서 나는 질보다 양이다. 필요한 것만 써달라고 부탁하는데, 센스가 더 무뎌질까봐 걱정이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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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은 자신이 내는 아이디어를 설득력 있게 표현한다. 대중이 자신의 어떤 얼굴에 웃고 우는지를 잘 안다. 오래 전부터 틈틈이 극장을 방문해 관객의 반응을 세심하게 살핀 덕이다. 특히 주연한 영화가 개봉하면 극장을 밥 먹듯이 찾아가 관객의 얼굴을 면밀히 관찰한다. 그는 "자신의 연기를 점검하는 시간"이라고 했다. 반복된 학습은 시나리오를 고르는 기준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병헌은 "웃음과 눈물이 있다고, 늘 봐온 영화라고 구분을 지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억지웃음이나 눈물을 짜내는 영화를 싫어한다. 웃고 나서 '내가 왜 웃었지?'라는 생각이 들면 실패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것만이 내 세상은 나름 담백한 편이었다." 느끼하지 않은 흐름에서는 인간 이병헌의 면면도 엿볼 수 있다. 특히 음식을 허겁지겁 먹는 모습이 판박이다. "영화를 본 지인들이 김조하를 두고 '너랑 비슷하다'고 한다. 소속사 직원들도 '연기하지 않은 것 같다'며 웃고. 일정 부분 인정한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먹을 게 있으면 일단 먹어두는 모습은 영락없이 닮았다. 입에 많이 넣어야 맛을 느끼는 편이다. 혹시 나만 그런가?(웃음)"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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