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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71]춘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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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71]춘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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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에 왔는데, 뜬금없이 엉뚱한 고장 사람이 떠오릅니다. 함경도 '원산(元山)' 갑부 '남백우(南百祐)'. 독립운동 자금을 댔는가하면, 일제의 벼슬을 살아서 친일 인명사전에도 올라있는 인물이지요. 귀가 밝았던 사람 같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도 민감했지만, 소리꾼의 등급도 매길 줄 아는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귀 명창(名唱)'이었을 것입니다. '박녹주(朴綠珠)' 소리의 미래를 단박에 알아채고, 열렬한 후원자가 된 사람이니까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탁월한 스카우트(scout) 혹은 매니저였습니다. 그녀가 조선 제일의 명창으로 우뚝 서게 되기까지, 이 스무 살 연상의 남편 도움이 컸을 것입니다.

 박녹주는 이 고장 출신 소설가 김유정(金裕貞)'이 '죽자 사자' 따라다니던 여인이기도 했습니다. 김유정의 애정고백은 대단히 전투적이었지요. 혈서를 쓰는가하면, 행패에 가까운 행동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어떤 날은 통사정, 어떤 날은 협박이었습니다. 동선(動線)을 꿰고 있는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났습니다.


 요즘 같으면, 당연히 구속감이었을 것입니다. 결과가 좋았을 리 없지요. 순정은 넘쳤으나, 사랑의 기술이 모자랐던 것입니다. 의욕은 넘쳤으나, 요령부득이었습니다. 두루 알다시피, 이 순진한 문학청년의 요란한 구애는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보기 좋게 퇴짜를 맞은 김유정은 방황 끝에 이곳 춘천으로 내려옵니다.

 쓰라린 실연의 경험이 문학적 성취동기를 자극했을까요. 신춘문예를 통해 세상에 나옵니다. '봄봄'과 '동백꽃'처럼 빛나는 명편들을 남깁니다. 여인에게 주려했던 사랑의 에너지까지 모조리 문학의 용광로에 들이부은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이 너무 짧았습니다. 눈부신 '글 꽃'들을 단숨에 피워놓고 고작 스물아홉에 삶을 마칩니다.


 훗날에 이런 사연들을 알게 된 박녹주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지요. "그런 사람인 줄 알았으면 그리 박대를 하진 않았을 것을. 손이라도 한번 잡아줄 것을." 안타까움도 컸을 것입니다. '만인(萬人)의 소리꾼'이 만인의 이야기꾼을 몰라봤으니까요.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는 자괴감에 가슴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원산의 사랑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남백우는 박녹주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지요. "당신은 내 여자지만, 당신의 소리(노래)는 만인의 것이오. 서울로 올라가서 하고 싶은 일을 하시오. 한 달에 한번쯤만 원산으로 내려오시오." 천하의 가객을 집안에만 붙잡아두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쉽지 않은 배려입니다.

[윤제림의 행인일기 71]춘천에서


 박녹주와 남백우 그리고 김유정. 춘천행 기차를 타면, 이 세 사람이 동시에 떠오르는 정거장을 지나게 됩니다. '김유정 역'. 저는 이 푯말만 보아도 가슴이 설렙니다. 인간의 이름이 땅이름이 되다니! 서양에선 흔한 일입니다만, 우리에겐 아직 낯설지요. 대지가 한 인간에게 전하는 사랑과 공경의 훈장입니다.


 '에베레스트(Everest)'처럼 남의 나라 산에 멋대로 제 나라 사람이름을 붙이는, 무례한 작명(作名) 방식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지요. 청년 김유정의 마음 속 광풍(狂風)과 화염(火焰)을 다스려준 어머니의 땅 춘천이, 아들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그 이름을 식당이 붙이고, 부동산 중개소가 붙입니다. 자랑스럽게 나눠 씁니다.


 김유정 역을 지나면 춘천역. 이 정거장도 세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춘천역장과 소설가 그리고 시인입니다. 서로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는 세 사람입니다.


 소설가 오정희 씨가 서울 나들이를 위해 춘천역사에 들어서면 어떻게 알았는지 금테 모자를 눌러 쓴 귀밑머리 희끗한 역장이 다가와 이렇게 인사한다고 합니다.//오 선생님, 춘천을 너무 오래 비워두시면 안됩니다."//그리고 측백나무 울타리 가에서 서울행 열차의 꽁무니가 안보일 때까지 배웅한다고 합니다.// 아, 나도 그런 춘천에 가 한번 살아봤으면!
- 이시영, '춘천' 전문


 춘천역장은 유명한 소설가가 춘천역 승객인 것이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소설가는 그것이 고마워서 고개를 숙이고 인사할 것입니다. 멀리서 이 사연을 전해들은 시인은, 그 모습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워 펜을 듭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정거장 정경이 또 있는가.' 그런 마음이 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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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를 시장님 모시듯 하는 정거장, 춘천역은 한겨울에도 따스할 것입니다. '춘천은 가을도 봄'이라고 노래한 시인(유안진)도 있었지요. 왜 아니겠습니까. 춘천은 겨울도 봄입니다. 아니, 일 년 내내 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이름을 정거장 이름으로 내걸 줄 아는 곳이니까요.


 에티오피아 커피 집 창가에서, 김유정과 박녹주와 남백우를 생각합니다. 춘천역장과 소설가 그리고 이시영 시인을 생각합니다. 춘천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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