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몸으로 쓰는 이야기]이소룡의 추리닝](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17062308542429433_2.jpg)
내가 이소룡(李小龍)이 나온 영화 <정무문>을 보았을 때는 1973년 여름이었다. 그 다음부터 나는 친구들과 이소룡 얘기만 하면서 해를 넘겼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훌쩍 날아오른 진진(이소룡의 영화 속 캐릭터)의 정지화면 위로 총성이 자욱하게 번져가던 장면을 수없이 떠올리며 형언할 수 없는 분노와 비장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했다. '아, 사나이는 저렇게 죽는 거구나.'
서울의 피카디리 극장에서 <정무문>을 본 초등학생에게 이소룡은 꿈이 되었다. <당산대형>, <맹룡과강>, <용쟁호투>, <사망유희> 등 이소룡이 나온 영화는 다 보았다. 이소룡의 '최종병기'인 쌍절곤을 익히느라 온몸이 늘 멍투성이였다. 우리 세대 누구도 이소룡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시도 때도 없이 이소룡의 그 '아비요~!'하는 괴성이 터졌다. 이소룡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준 충격은 작지 않았다.
<정무문>을 본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나는 어머니를 졸라 동네 체육사에 갔다. 아령, 줄넘기, 축구공이나 야구방망이를 파는 그곳에서는 체육복을 맞추기도 했다. 나는 이소룡이 입었던 것과 같은 '추리닝'을 맞추고 싶었다. 노란 바탕에 검은 줄이 들어간. 하지만 일주일쯤 지났을 때 나는 초록색 바탕에 노란 줄이 들어간 추리닝을 입고 있었다.
가을에 맞춘 추리닝을 겨울에도 봄에도, 여름이 시작되기 전까지 입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줄이 세 개 들어간 A운동화를 구해 신었다. 추리닝을 입고 그 운동화를 신으면 잘 어울렸다. 한창 자라던 나이. 추리닝의 바짓단은 땅에 끌리는 듯하더니 이내 9부, 8부로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무릎이 튀어나오고, 그곳이 반들거리기 시작했다. 곧 구멍이 났다.
어머니는 튀어나오고 늘어지고 반들거리며 구멍이 난 그곳에 다른 옷감을 대 기워 주셨다. 잠바 팔꿈치, 바지의 무릎을 덧대 깁는 어머니의 솜씨는 양장점 주인 못잖았다. 그러나 나는 무릎을 기운 그 추리닝을 입고 밖에 나가지 않았다. 다른 옷은 몰라도 이소룡 흉내를 내려고 맞춰 입은 추리닝의 무릎을 기워 입고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결코 가난한 집은 아니었는데, 어머니는 내가 새 추리닝을 사달라고 졸라도 들어주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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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무릎을 기운 캐주얼 재킷이 유행했다. 주로 코르덴을 옷감으로 사용해서 공장에서 낼 때부터 팔꿈치 부분에 섀미나 인조가죽을 덧댄 것이다. 어떤 재킷은 숄더백 끈을 걸치는 어깨 부분에도 섀미를 덧댔다. 청바지나 색이 들어간 면바지에 체크무늬 셔츠를 받쳐 입고 재킷을 걸치면 1980년대의 대학 캠퍼스나 그 주변 풍경과 잘 어울렸다. 그래도 무릎을 덧댄 바지는 보지 못했다.
튀어나온 무릎, 그래서 덧댄 옷가지들은 과거의 한 세대가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했던 가난과 곤궁을 상징한다. 가난하든 그렇지 않든 기운 옷을 입어보지 않은 내 또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아이 둘을 키우는 동안 무릎 기운 옷을 입히지 않았다. 해마다 구호단체에 보내는 옷가지 중 어디를 깁거나 덧댄 옷은 없다. 분명 풍요의 시대다. 그러나 무릎을 깁는 어머니의 섬세한 손길, 그 사랑과 아련한 그리움이 언제나 가슴 속에 남아 있다.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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