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언론의 '북 정권교체론' 불 당긴 키신저 발언과 이코노미스트의 제언
헨리 키신저(미 전 국무장관)의 발언이 방아쇠였다. "북한 정권 붕괴 이후 상황에 대해 미-중이 사전 합의할 필요가 있고, 특히 중국을 안심시키기 위해 미군이 한반도에서 전면 철수하는 방안을 검토할 만하다."(뉴욕타임스 지난30일 보도). 이 말 속에 들어있는 '북한 정권 붕괴'라는 자극적인 가정법(假定法)이 많은 이들의 관심을 움직였다. 즉 북한 정권 붕괴라는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 정치권력 교체)' 전략이 현 한반도 핵위기 상황을 푸는 한 방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 핵무기 포기한 군부 혹은 엘리트로 교체
월스트리트 저널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31일자 사설에서 "미국은 김정은 정권을 교체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는 현실적인 방안은 '정권 교체'라는 방식이 타당하다고 본 것이다. 이 신문은 이렇게 부연했다. "무모한 김정은 대신 핵무기로 세계를 위협하지 않는 군부 혹은 엘리트 집단이 북한을 통치토록 해야 한다. 북한 정권 교체는 군사 공격이 필요없고 한반도 통일도 수반하지 않는 방안으로 동북아 정세가 단숨에 좋아질 수 있다."
미국 내 여론의 이같은 변화는, 김정일 사망 이후 한동안 사라졌던 북한 레짐체인지론이 부활한 양상이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일본까지 한반도 주변 4강은 김정은의 세습을 사실상 인정했다. 김정일 사망 당시 미 정부는 "북한 주민들에게 걱정과 기도를 전한다"면서 "북한의 새 리더십(김정은)이 국제사회에 대한 약속 이행, 이웃 국가와의 관계 개선, 주민 인권 존중으로 북한을 평화의 길로 안내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언급한 바 있다. 당시 백악관 대변인(제이 카니)도 "김정일은 김정은을 공식 후계자로 지명했고, 다른 변화가 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면서 권력 승계를 인정했다.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후진타오 당시 주석은 김정은이 북한군 최고 사령관으로 추대됐을 때 "중국과 북한의 인민과 군은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갖고 있으며 새로운 역사상황에서도 계속 강화될 것으로 확신하다"고 축하했다.
▶ 김정은 집권 이후 금기어로 된 '북 정권교체'가 다시 부활한 까닭
당시 미국과 중국이 김정은 정권을 인정한 것은, 당연히 자국 이익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미국의 경우는, 핵무기와 관련하여 북한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자 했다. 북핵 문제는 백악관에겐 무시할 수 없는 정치변수이기에, 굳이 새로운 통치자를 건드려 문제를 뒤엉키게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중국은 새로운 북한 체제가 안정돼야 그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으며 국제적인 실력 행사에도 유리하다고 보았기에 김정은을 밀어주는 입장에 섰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정권교체론은 암묵적인 금기어가 되었다. 전 미국 국무부 정치군사 담당 차관보였던 로버트 갈루치는 "북한정권을 교체하겠다거나 북한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얘기를 해선 안된다"고 주장하고 "미국은 북한의 권력승계를 참고 기다려야 하며 핵 문제를 협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전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였던 스티븐 보즈워스도 같은 목소리를 냈다. "미국은 북한이 과도기를 끝낼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이 옳다."
▶ 이코노미스트 "김정은 체제를 놔둔 채 핵 불안을 재울 수 없다"
이런 분위기를 깬 것은 2011년 12월31일자로 나온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였다. 이 잡지는 사설에서 "국제사회가 본격적으로 북한의 정권교체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특히 한국은 물론 한반도 주변 국가들이 북한의 정권교체를 희망하는데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철저히 계획을 세워야 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이 잡지의 논지는 정연하지만 직설적이다. "김정은은 북한을 통치해온 왕조적 스탈린주의 독재의 3대일 뿐이며 동일한 체제의 유지는 북한 주민 생활에는 고통의 연장을 의미하며 국제사회에는 핵위협의 지속을 의미한다"고 못박는다. "북한이 혼돈 속에 붕괴되더라도 한반도 평화라는 장기적이고 잠재적인 혜택은 북한뿐 아니라 중국 등 주변국을 위해서도 현재의 불안정한 상태를 지속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말도 했다.
▶ 키신저 '북한 붕괴'발언과 정확히 일치한 이코노미스트 사설
이코노미스트의 북한 정권 교체론은 중국의 역할을 강조하는 점이 주목을 받았다. "한미 양국이 북한 정권 붕괴가 가져오는 위험한 결과를 최소화한다면 중국은 북한의 정권교체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면서, "한미 양국은 한반도에 평화가 조성되면 주한미군이 더 이상 한반도 남아있지 않을 것임을 중국에 알려 안심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의견은, 바로 지난 30일 키신저가 했던 말과 정확하게 궤를 같이 한다.
▶ "북한정권 붕괴 이후 위험을 최소화하면 중국이 나설 것"
전 대북인권특사인 제이 레프코비츠(부시 행정부에서 활약)는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김정은 정권의 핵 보유를 용인할 수 없고 그렇다고 북한을 타격할 수도 없는 상황인 만큼 유일한 대안은 절대적 대북 영향력을 갖고 있는 중국을 통한 압박밖에 없다"고 전제하고 "한국에 의한 한반도 통일에 반대하는 중국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한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을 미국이 지원하는 정책부터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에 의한 북한 정권교체가 한반도 상황을 안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카드임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아시아경제 티잼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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