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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연석의 Cine Latino]고장난 분노 게이지를 되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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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영화 '와일드 테일즈: 참을 수 없는 순간'

[배연석의 Cine Latino]고장난 분노 게이지를 되돌려라 영화 '와일드 테일즈'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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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아름다운 젊은 여자가 비행기에 오른다. 좌석을 찾은 그녀의 캐리어 가방을 선뜻 짐칸에 올려주며 호의를 베푸는 중년 남자. 비행기가 이륙하자 옆좌석에 앉은 그 남자는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건다. 두 사람은 서로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는다. 여자의 직업은 모델, 남자는 클래식 음악평론가. 자신의 첫 남자친구도 클래식 음악가였다는 여자의 말에 남자는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 한다. 여자는 그리 유명 하지도 않고 큰 성과도 없으니 모를 거라며 무심하게 옛 남자친구의 이름을 알려준다.


 "가브리엘 파스테르나크".

 남자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오래전에 그를 평가할 기회가 있었고, 너무 형편없어서 망신을 주었으며, 그런 실력으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느니 개인의 자존심을 뭉개 주는 게 맞았다며 안 해도 될 말까지 하며 씹어댄다. 그때 뜬금없이 앞자리에 앉았던 중년 여성이 끼어든다. 이런 우연의 일치가 있느냐며, 자신이 가브리엘의 초등학교 담임선생이었으며 확실히 그 학생은 문제가 있는 이상한 아이였다고 맞장구를 친다.


 이때 앞 자리에 앉은 청년이 "레기사몬 선생님 아니세요?"라고 묻는다. 그는 자신도 선생님에게서 배웠다고 반가워하며 가브리엘은 자기도 기억한다고, 친구들과 함께 불쌍할 정도로 괴롭혔다고 말하며 웃는다. 이번엔 뒷좌석에 한 남자가 다가온다. "이건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야!"라며. 그는 자신이 가브리엘 파스테르나크의 상사였는데 가브리엘이 일을 엉망으로 해서 해고당했다고 전해준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든 음악평론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행기 안의 승객들을 돌아보며 외친다. 혹시 여기 가브리엘 파스테르나크를 아시는 분이 더 계신가요? "저요!" "저요!" 여기저기서 손을 드는 승객들. 그때 여승무원이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나타나 "가브리엘은 사실 이 비행기의 승무원이다. 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는데 거절하자 상당히 화가 났다.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조종실로 커피를 가져갔는데 지금 조종실 문이 닫혀 있고 연락도 안 된다"며 울먹인다.


 모델이라는 여자가 "사실은 가브리엘의 친구와 바람을 피워서 헤어졌다"고 고백하는 순간,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리며 기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한 남자가 조종실 앞으로 달려가 문을 두들기며 외친다. "가브리엘, 문 열어! 나랑 얘기 좀 하자, 제발!" 뒤따라온 초등학교 동창이 "당신은 누구냐"고 묻자 그는 자신이 가브리엘의 심리상담 의사이며 진료비를 올린 뒤로 그가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설명한 다음 다시 문을 두들기며 절규한다.


 "가브리엘!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너 또한 피해자일 뿐이라고! 너를 이렇게 만든 건 모두 너의 부모님 잘못이야! 어렸을 때부터 너에게 너무 많은걸 요구하고 학대했기 때문이라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2


 한적하고 평화로운 별장에 노부부 한 쌍이 벤치에 앉아 각자 책과 신문을 보며 느긋한 시간을 보낸다. 그들의 뒤로 저 멀리 점처럼 보이는 물체가 서서히 그들에게 다가온다. 비행기다. 노부부가 뭔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뒤를 돌아 본다. 굉음과 함께 비행기가 순식간에 그들을 덮친다. 그 순간 영화의 타이틀이 뜬다. 근래 나온 영화 오프닝 중에 최고라는 찬사를 받은 아르헨티나 영화 <와일드 테일즈: 참을 수 없는 순간>이다.


 이 영화는 상당히 독특한 영화다. 기획 단계부터 상업영화로 제작되었지만 이례적으로 칸영화제 경쟁부문까지 올랐다. 영화는 아무 연관이 없는 에피소드 여섯 개로 구성되었으며, 각 에피소드의 인물들이 분노를 참을 수 없는 순간에 선택하는 행동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오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극중 인물들이 겪는 사건들은 대개 나에게도 일어날 법한 일, 어쩌면 '그냥 내가 참자' 하고 지나칠 법한 일들이어서 더 마음에 와 닿는다.


 한적한 고속도로에서 속력을 내려는 고급승용차와 길을 안 비켜주는 고물자동차. 신경전은 보복운전으로 이어지며 서로 불리한 위치에서 피차 해를 끼치며 엄청난 싸움으로 번진다. 레스토랑 종업원은 어릴 적 자신의 가족을 풍비박산 냈기에 평생 저주해온 고리대금업자가 손님으로 오자 우연히 눈에 띈 쥐약을 보며 갈등한다. 한 폭발전문가는 합법적인 주차구역에 차를 세웠지만 견인된 데 항의하다 일이 점점 더 커져서 일도 가정도 잃게 되자 복수를 계획한다.


 어느 기업의 오너는 음주 운전을 하다 임산부를 치어 죽게 한 뒤 나타난 철없는 아들의 죄를 돈으로 은폐하려 한다. 그는 자신의 변호사와 검사 그리고 대신 죄를 뒤집어 써줄 집사가 서로 돈을 챙기려 협상하는 꼴을 지켜보다 분노한다. 새신부는 하필 결혼식 피로연에서 신랑이 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상대가 파티장에 태연히 앉아 있는 꼴을 보자 눈이 뒤집힌다. 그녀는 많은 하객들이 보는 앞에서 파티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복수할 궁리를 한다.


 관객은 영화를 보며 때로는 폭소를 터뜨리고 때로는 실소를 어쩌지 못하며 코미디 같은 상황이 마무리될 때쯤에는 남의 일 같지 않은 공감과 더불어 씁쓸함을 맛보기도 한다.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을 참을 수 없는 분노. 화를 삭이며 참아야 했던 그 순간들을, 그 마음들을 대변하듯 이 영화는 감정을 폭발시켜 싸워주고 복수해주고 있다. 그러나 단지 관객에게 통쾌함을 선사하려는 의도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영화는 분노를 제공하는 사회의 시스템을 고발하지만 타인에게 그것을 분노로 돌려주는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 짓인지 경고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데미안 스지프론 감독(42)은 2002년 아르헨티나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가짜들(Los simuladores)>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뒤 상업영화 두 편을 감독했다. <와일드 테일즈; 참을 수 없는 순간>의 세계적인 성공을 통해 할리우드에 입성, 지금은 미국 텔레비전 드라마 '600만불의 사나이'의 리메이크 영화버전을 제작하고 있다. 올해 안에 전 세계에서 개봉할 예정이다.


[배연석의 Cine Latino]고장난 분노 게이지를 되돌려라

■배연석 객원기자는 … 서울에서 태어나 열두 살에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가 그곳에서 영화를 사랑하는 청년으로 자랐다. 팔레르모대학에서 광고학, TIS 방송전문대에서 연출ㆍ제작을 전공한 그는 2005년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어주나요?(Do U cry 4 me Argentina?)'를 제작해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이 작품은 부산, 토론토 영화제 등 여러 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2006년에는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아시아경제에 남미영화 소식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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