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저격수' 여성 킬러들
'복수의 립스팁' 타나부터 '악녀' 숙희까지...女 킬러명단
주어진 임무 수행하지만 억압된 사슬 부수거나 남성에게 복수
분노와 살기 사방으로 분출...조금만 건드리면 울음 터뜨리는 순수한 여인들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얼굴이 굳어진다. 언짢은 눈초리는 슬픈 빛을 띤다 싶더니 동공에 물기가 어려 반짝거린다. 다시 킬러다.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변기 밑에서 저격총 부품들을 집어 든다. 조립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능숙하게 개머리판을 어깨에 대더니 환풍기 너머에 있는 남자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방아쇠를 당기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여자의 이름은 숙희(김옥빈). 어떤 이유로 결혼식을 앞두고 저격하는 걸까.
영화 '악녀'의 숙희는 한두 마디로 소개할 수 없다. 곱다래 보이는 얼굴과 달리 팔자가 무척 사납다. 어디 그녀뿐이겠는가. 여성 킬러 대부분이 기구한 운명과 마주하면서 총과 칼을 가까이 한다.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지만 억압된 사슬을 부수거나 자신을 괴롭힌 남성에게 복수한다. 어두운 과거 때문에 조용하다가도 죽이기로 마음을 먹은 뒤로는 악녀가 된다.
아벨 페라라 감독(66)의 '복수의 립스틱(1981년)에서 타나(조 런드)는 패션회사에 근무한다. 언어장애가 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창백한 피부로 바퀴벌레 한 마디로 못 잡을 것 같은 얼굴이다. 그녀는 불운하게도 하루에 두 번 강간을 당한다. 발버둥을 치다 잡은 다리미로 남성의 머리를 내려친다.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타나는 살육의 여신이 된다.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성들을 모조리 총으로 쏴 죽인다. 위험에 처한 자신을 구하려는 남성마저 희생양으로 삼는다.
자아도취에 빠진 그녀는 후반부 파티를 대학살로 장식한다. 까만 수도복을 입고 붉은 립스틱으로 입술을 적신다. 탄약에 입을 맞추고 트럼펫 소리가 요란한 무대로 들어가 권총을 뽑아든다. 총알받이는 당연히 남자들이다. 변태나 괴물로 변장한 그들에게 주저 없이 총구를 겨눈다. 긴장과 불안이 감돌지만 타나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지워진 것처럼 무표정하다. 이미 자신의 욕망을 수도복과 십자가로 정당화해 불타는 사명감으로 가득하다. 이 시퀀스는 슬로 모션으로 흐른다. 그래서 그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남자들을 찾는 모습이 악행을 응징하러 내려온 구원자 같다.
타나의 아드레날린이 직선으로 분출된다면, '킬 빌(2003년)' 속 더 브라이드(우마 서먼)의 분노는 사방으로 튄다. 서슬 퍼런 검으로 주위를 피바다로 만든다. 그녀는 오 렌 이시(루시 리우)에게 복수하는 일본의 클럽에서 이소룡을 연상케 하는 노란색 체육복을 입고 있다. 180㎝의 큰 키와 금발의 긴 머리로 색다른 위압감을 전하며 복수의 칼을 꺼낸다. "오 렌 이시.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다다미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야쿠자들은 그녀의 화려한 검술에 발이 잘리거나 목이 날아간다. 공간감을 극대화한 촬영으로 결의에 찬 에너지가 사방을 뒤덮는다. 이 기운은 흰 눈이 소복이 쌓인 마당에서 오 렌 이시를 마주하면서 다시 고스란히 모아진다. 정제된 동작과 묵직한 검의 기운과 어우러져 또 다른 파괴력으로 나타난다.
복수에 성공한 더 브라이드의 얼굴은 허망함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눈길을 터벅터벅 내딛는 발걸음이 여느 때보다 무겁다. 아주 특이한 사례다. 허무하고 고독한 감정이 대개 남성 킬러들에게서 엿보이기 때문이다. 여성 킬러들의 액션은 거의 분노와 살기에 초점이 맞춰진다. 뤽 베송 감독(58)의 '니키타(1990년)'에서 니키타(안느 파릴로드)는 숙희처럼 국가 정보기관에 끌려들어가 인간병기로 길러진다. 혹독한 훈련에서 그녀는 광기를 드러낸다.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권총을 쏘는가 하면, 유도 사범과의 대련에서 느닷없이 뺨따귀를 날린다. 다시 가진 대련에서는 귀를 물어뜯고는 클래식 선율에 맞춰 광대처럼 춤을 춘다. 사랑하는 남성을 만나면서 마음은 한결 차분해진다. 하지만 계속된 임무로 총을 내려놓지 못하면서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하지만 늘 불안한 얼굴이다. 조금만 건드리면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순수한 여인이다.
눈물이 메마른 여성 킬러는 아마 없을 것이다. '네이키드 웨폰(2002년)'의 샬린 칭(매기 큐)은 남다른 액션을 보이지만 감정에 충실한 캐릭터다. 어린 나이에 훈련을 시작했다. 동료를 죽이고 강간까지 당해야 하는 참혹한 환경에서 단짝인 캐서린(안아)과 함께 살아남았다. 혹독한 고생의 흔적은 액션에서 고스란히 나타난다.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아 권총을 집어 드는가 하면, 날아드는 액자를 막고 그 유리 파편을 한 주먹에 집어 던진다. 임무를 수행하고 빠져나오는 길에는 섹시한 매력을 드러낸다. 빗속을 맨발로 뛰어다니는데, 속옷이 흠뻑 젖어 속살이 훤히 비친다. 생사가 눈앞을 오고가는 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서정적인 음악이라도 흘러나와야 비참한 현실을 원통해한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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